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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일 설날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2년 2월 1일 (화) 설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당신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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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민수 6장 22-27절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화답송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제2독서
야고 4장 13-15절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복음
루카 12장 35-40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서로 복을 빌어 주며 시작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친교의 제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올해도 저희가 주님의 보호로 모든 해악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언제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집전
2022년 2월 1일 (화)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음력으로 새해 첫날을 보내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고대 사람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즐겨 입었기에, 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는 움직임을 편하게 하려고 긴 옷을 허리띠로 조절하고 동여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 함은 즉시 움직이거나 일할 채비를 미리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불이 켜진 등불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이 깨어 있음을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이하려면 종은 등불을 켜 놓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늘 깨어 기다리는 자세. 새로운 한 해의 출발점에 선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재림의 순간이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우리는 동여맨 허리띠를 풀고 긴 옷을 느슨히 늘어뜨린 채 주인이 되도록 늦게 오기를 바라는 게으른 종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재림 때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그 앞에 서서 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는 자’는 사실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 다가와 문을 두드리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재림 때 맞이할 주님을 이미 일상에서 맞이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깨어 기다리는 시간은 더 이상 지루할 틈이 없는 기쁨의 시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느라 고생한 종들을 위하여 몸소 시중을 드시는 주인의 감동적인 사랑을 충만히 느끼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축복받고 축복하는 올해
임인년 새해가 밝았고 새날이 왔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이 왔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해와 새날이 오고 명절이 되어도 무덤덤합니다.
그것은 저뿐이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 대부분이 그럴 텐데 많이 살아본 결과 새해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새해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코헬렛서가 얘기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지금 있는 것은 전에 있었던 것이요 장차 있을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력으로 작년 12월 31일과 신년 1월 1일을 맞이하며 저 개인적으로는 정말 무덤덤하게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번 설을 맞이해서도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맞이해도 되는지 성찰해봤습니다.
우리는 새해와 새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우선 물리적으로 새로운 한해가 오고 새날이 밝은 것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새해와 새날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해와 새날을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새해와 새날의 주인은 시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지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면 우리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덤덤하게 맞이해야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새해를 새로 태어난 손자처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해가 주어진 것이 너무도 고맙고 놀라운 선물로 말입니다.
한번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그래서 새날이 되어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너무도 통증이 심합니다. 그래도 나는 더 살고 싶고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무도 행복하고 새날은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새해와 새날은 달력이 바뀌는 새해와 새날이 아니고 더 살고 싶은 새해 곧 생명의 새해가 선물로 주어진 새해요, 더 하고 싶은 일 곧 사랑의 새날이 선물로 주어진 새날이어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내게만 새해와 새날을 주시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새해와 새날을 주시고 그래서 이 명절을 같이 지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명절에 같이 지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런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새해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것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같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지금 미워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얘기입니다. 지금 미워하는 사람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요.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올해 내가 사랑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주심에 감사하는 우리는 이제 그렇지 못하고, 그럴 수 없는 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명절에 너무 아픈 분들, 북에 가족을 두고 온 분들, 독거 노인이나 생이별을 하신 분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복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분들을 기억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을 올해 빼앗아가실 겁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빼앗으시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버린 것이니 사랑이 없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올해는 축복받는 올해, 축복하는 올해가 되고, 사랑받는 올해, 사랑하는 올해가 되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꿈에서 본능이 통제되지 못하는 이유 : 잠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
오늘은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시작은 마침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한 명의 종을 대상으로 시중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 개신교 ‘다니엘라’라고 하는 여자 청년의 간증이 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이 자매는 부모님을 지독히 미워하였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클럽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동성애자들 때문에 자신도 동성애자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그녀를 깨어날 힘을 주지 못했고, 그녀는 예뻐지고 유명해지려는 것, 육체의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두바이로 가서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고 어느새 인스타 유명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설교시간에 나가 화장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는 이미 끝나있는, 뭐 그런 신앙인이었습니다. 외로워도 보았고 유명해져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먼지를 먹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찬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오래된 동영상이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1990년대의 교회 집회 영상이었습니다. 세련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오래된 기도회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뜨거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 뜨거움이 다니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지금 청년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그런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왜 요즘 친구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냐면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교회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하나님 그렇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같이 악한 자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려고 어떤 세련된 말,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찾아와서도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 성도들이 모여서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찬양하는데 거기서 예배가 진실하게 드려지니까 그걸 통해서 저에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왜 공동체가 사람을 바꿔놓을까요? 양심을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혼자 있을 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면 엄청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변하고 싶은 사람은 변화된 공동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이 깨어있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함께 머무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깨어있음과 반대로 잠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였습니다. 무의식이란 바로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잠에 빠졌을 때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 욕망이 활개를 쳐서 그런 꿈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몸이 아프다고 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는 몸의 증상도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몸이 아픈 이유를 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통로로 보았습니다.
그녀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녀가 조카가 죽어서 장례식에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심지어 기분이 좋은 마음마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언니의 남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그러한 관계를 언니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죽게 된 것입니다. 언니가 죽으니 다시 형부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욕망을 ‘원초아’(Id)라 하였고, 이 욕망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기재를 ‘초자아’(Super-ego)라 불렀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엔 원초아밖에 없습니다. 원초적 본능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초자아보다 더 먼저 형성되는데 젖을 먹고 싶은데 숟가락이 입에 들어올 때 생겨납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것입니다. 초자아는 부모님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배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세상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회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활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는 가정에서 사회성이 형성되면서 함께 발달한 것이기에 덜 사회적일수록 더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사회적일 때 더 윤리적 인간이 됩니다.
요즘 가정이 많이 분해되고 있습니다. 명절은 특별히 가족이 왜 한 데 모여서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은 바로 우리가 생존 본능에서 양심에 통제받는 사람이 되는 성장을 처음으로 이룩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때는 우리가 왜 교회 공동체에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현명한 처녀, 미련한 처녀 내용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현명한 처녀들 안으로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현명한 처녀 무리로 들어왔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성령의 기름으로 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다섯이라는 육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섯이라는 성령으로 육체를 이긴 이들 무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원초아를 눌러줄 초자아는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특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의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는 지인이 감동적인 영상이라면서 제게 하나의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갓 탤런트’ 무대에 오른 제인 마르크레프스키라는 어느 여가수의 영상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의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폐와 간 그리고 척수까지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작곡으로 ‘It’s Okay’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고나왔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노래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변의 환경이 먼저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일분일초가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먼저 결심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삽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을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갈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1독서의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는 민수기 말씀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늘 남이나 주변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면서 기다릴 때 생기는 감정이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남보다 ‘나’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줄이면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결심을 합니다. 올해에는 남 탓, 주변 탓, 환경 탓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탓’만 하다가 결국 후회만 남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힘주어서 하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비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40)
준비하는 길이 사람의 길이다. 설과 설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다. 봄을 맞이하기 전에 설명절이 있다. 교만을 내려놓는 설 명절이다. 마음도 때를 놓치면 서로가 아프다. 행복한 마음은 흘러갈 때 흘러가는 마음이다.
돌아갈 길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우리 삶을 들어올리는 기도와 사랑의 뜨거운 새날 새아침이다. 삶을 깨우는 것은 또 다른 삶이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삶을 다시 깨우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고향이 있듯 우리 삶을 기다려주시고 깨우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그리움과 사랑이 있기에 삶은 아직 따뜻하다. 흘러 넘치는 욕심이 아니라 준비하는 사랑이다. 깨어있고 준비하는 올 해의 마음을 기쁘게 봉헌한다.
아름다운 삶을 하느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설날의 아침이다. 소중한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더 많이 행복하고 더 기쁘게 건강하신 새해이길 기도드린다.
하느님께 행복을 묻는 설날이다. 또 가장 좋은 것만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는다. 곧바로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마음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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