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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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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2년 2월 2일 (수) 주님 봉헌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주님 봉헌 축일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합니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주님의 길을 닦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정결례를 거행하는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다. 시메온은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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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말라 3장 1-4절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장 22-40절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시메온의 기다림을 채워 주셨으니 이 성체를 모신 저희가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듯이 저희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2022년 2월 2일 (수)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첫아들로 태어난 그 갓난아기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특별한 존재였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맏아들, 가축의 맏배, 햇곡식 등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것들을 주님께 바치도록 규정하는데(탈출 13,2; 레위 23,10 참조), 이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가장 좋은 것을 내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봉헌합니다.

성전에 등장하는 나머지 두 인물도 자기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였던 이들입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곧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될 구원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나도 마찬가지로 과부로 지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값진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약한 수도자들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봉헌된 이들의 숭고한 삶에 깊은 존경과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우리 각자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봉헌할 수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주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구원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남 탓 하지 말고.

 

요즘 수도원 성소자가 점점 줄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젊은이가 수도 생활이나 봉헌과 다른 가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즘 젊은이들이 점점 보수화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고, 사회 정의보다는 공정을 더 중요시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공정도 나의 이익이나 불이익과 관련된 공정에 민감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전의 젊은이보다 더 행복한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젊은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어른인 우리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 시대 곧 신자유주의시대의 그 악마적인 정신이 우리 어른들도 모르게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키우게 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이기주의적으로 남용하게 만들고, 쾌락과 욕망을 정당화함으로써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하는 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게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재미가 중요하지 의미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것을 수도 생활 곧 봉헌 생활과 하나하나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수도 생활/봉헌 생활은 복음적 권고를 사는 것이고, 복음적 권고를 사는 것은 복음의 행복을 사는 것인데 복음적 권고 중에 가난이 먼저 신자유주의와 충돌합니다. 

왜냐면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소유욕을 부추기고 소비를 부추깁니다. 신상품과 계속되는 광고가 우리를 소유하고 소비하라고 쇠뇌합니다. 그래서 왜 가난을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게 하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며 가난을 살 마음을 없앱니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신조가 자유 곧 개인의 자유이기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순종은 가난보다도 더 살기 어렵습니다. 자유로이 자유를 봉헌하는 사람만이 순종을 살 수 있는데 자유로이 자유를 봉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결과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욕망을 정당화하고 쾌락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가 정결을 의미있다고 할 리 없고 사랑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사랑마저 자기중심적으로 하게 하고 이기주의적인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도 받을 사랑만 있지 줄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생활을 하려고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와 탓을 신자유주의에 모두 돌리고 저희가 잘못 살아서 이렇게 된 것을 책임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수도 생활을 하기에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지원자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젊은이들이 감동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 잘살았어야 했고 그 삶이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줬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실까요? 

그러므로 시대를 탓하기보다 감동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저희 자신을 탓하고 주님의 봉헌에 비추어 저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봉헌된 이들, 특별히 수도자들의 봉헌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자녀를 봉헌하는 전통’입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전통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자녀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고, 또 12~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며 완전히 주님 것으로 내어드립니다. 우리도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그리고 견진성사가 있기에 이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부모의 정신과 우리 신앙인의 정신은 자녀를 봉헌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봉헌하면서 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칩니다. 이 제물은 가난한 가정이 자녀 대신 바치는 것인데, 이 제물들은 다 죽임을 당해 주님께 불살라집니다. 이 제물이 불살라질 때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주님께 봉헌된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권리를 ‘나의 것’으로 절대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조선 시대, 효종 임금의 친척 중 ‘덕원령’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國手)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습니다. 덕원이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마치 심심하던 차라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첫 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 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습니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습니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이, 이 사람아.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렸지만, 그 사람은 정색하며 고집하였습니다.

“나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와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습니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덕원령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상대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하고 제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에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지식’이라 하면, 그 바둑을 지면서까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지략이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이 성장은 분명 아드님의 봉헌과 관계가 있습니다. 봉헌은 성장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만드는 고치를 봅시다. 그 고치의 크기는 그 안에서 자라는 나비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그 고치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고치 크기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부모에 의해 정해집니다. 

부모가 심할 경우 그 경계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는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어도 실제로 상처받은 아이로 남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를 봅시다. 히틀러는 아버지로부터 강요와 체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경계선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를 히틀러는 감히 누가 자신을 건들려고 하면 굉장한 화를 낼 것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계는 무시할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계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은 자기 속으로 더 들어가고 남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관계 불능의 상태로 성장합니다. 

그 경계를 엄청나게 존중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과잉보호입니다. 문제는 그 크기가 너무 좁고 두꺼워 숨 막혀 죽는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엄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딸’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배우 출신 재무 설계사 여현수 부부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하자, 예의 주시하다가 결국 도와줍니다.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려고 할 때 자다가 오줌을 쌀까 봐 아이도 불안하고 엄마도 불안합니다.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기도하고 자고, 엄마는 결국 아이가 잠들기 전에 올라가 화장실에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범위를 엄마가 막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자라면 마마보이, 마마걸이 됩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존감 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더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아들을 살찌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고치의 크기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크기로 커집니다. 

tvN ‘고스트 닥터’에서 정지훈은 실력은 좋지만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인 천재 의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고가 나서 코마 상태로 빠지고 영혼이 병원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버릇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되며 서로 성장해가는 내용입니다. 

유령이 된다는 말은 지금의 껍데기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니 자신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변해온 모습까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알게 되고 점점 착한 의사가 되어갑니다. 성장은 이렇게 이뤄집니다. 부모가 아이를 자기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그 틀을 깨고 더 넓고 큰 고치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려면 탄생과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포함하는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녀가 믿게 하려면 부모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둑에 져서 맡겨놓은 말처럼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건들지 말고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는데, 우리는 왜 할 수 없겠습니까? 봉헌은 바로 아이의 경계를 죽은 뒤까지 확장하는 것임을 알고 나의 세계에 아이를 가두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봉헌되지 않아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울 때가 아니라 선물을 찾아야 할 때

 

우리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결혼으로 처녀·총각의 삶이 끝난 것 같지만, 가정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정년퇴임, 은퇴 등으로 사회생활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삶인 인생 2막의 시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작과 끝은 늘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끝을 보면서 절망과 좌절을 하고, 누구는 시작을 바라보며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끝’이라는 체험을 하게 될 때, 새로운 ‘시작’의 희망도 맞물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도 분명 희망이 맞물려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사제 연피정에서 피정 지도를 해주셨던 주교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오면, 눈을 감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 하느님의 선물도 같이 오기에 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눈 감고 울다가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슬피 웁니다. 그러나 울 때가 아니라 선물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봉헌 축일을 오늘 보냅니다. 이날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 예언자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 예언자를 만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며 큰 기쁨을 표현했고, 한나 예언자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인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말씀이 실현되었음을 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세의 점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두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선물이 이 땅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계속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어쩌다 기도하고 어쩌다 성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늘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기에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간에 자유의 공간을 인정하고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류해욱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 22)

 

종신서원 때의 그 떨림과 그 감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느님께 올려지는 모든 것은 뜨겁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봉헌을 가르쳐주신다. 먼저 하느님께 바쳐지는 봉헌의 삶이다. 

가장 적극적인 사랑이 바로 봉헌이다. 봉헌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봉헌은 단순하고 축성은 소박하다. 거룩함은 생활을 끌어안고 있다. 하늘의 삶은 봉헌의 삶이다. 거룩함은 봉헌으로 시작되고 봉헌은 생활로 이어진다. 

주님의 모든 시간은 봉헌의 생활이었다. 수도자는 봉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생활을 새롭게 맛본 행복이다. 봉헌과 축성의 은총으로 복음의 새생활을 배운다. 

봉헌이 무너지면 생활도 무너진다. 봉헌의 생활로 주님을 닮아간다. 봉헌은 삶의 모든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봉헌이 우리 모두를 살리고 있음을 믿는다. 생생한 봉헌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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