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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3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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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2022년 1월 31일 (월)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입니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요한 보스코는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했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 임금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기게 되자, 그는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31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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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사무 15장 13-14절, 30절, 16장 5-13ㄱ절

 

압살롬에게서 달아납시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그 무렵 

13 
전령 하나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습니다.” 

14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어서들 달아납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서둘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서둘러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칼날로 이 도성을 칠 것이오.” 

30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계속 올라갔다. 

16,5 
다윗 임금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온 백성과 모든 용사가 임금 좌우에 있는데도, 그는 다윗과 다윗 임금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졌다. 


시므이는 이렇게 말하며 저주하였다.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 


사울의 왕위를 차지한 너에게 주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돌리시고, 그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너는 살인자다. 이제 재앙이 너에게 닥쳤구나.”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 

10 
그러나 임금은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11 
그러면서 다윗이 아비사이와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13 
다윗과 그 부하들은 길을 걸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 어찌 이리 많사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하느님이 저런 자를 구원하실까 보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당신은 저의 방패, 저의 영광, 제 머리를 들어 높이는 분이시옵니다. 제가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시나이다.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기에, 누워 잠들어도 나는 깨어나니,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무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저의 하느님.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5장 1-20절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요한을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전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2022년 1월 31일 (월)
전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3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는 어떠한 경계나 제한이 없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센 돌풍이 이는 호수를 건너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도착하십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며, 곳곳에 무덤이 있고, 유다인들에게는 부정한 돼지 떼가 방목되는 지역입니다(이사 65,4 참조). 

‘군대’라고 불리는 더러운 영은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는 엎드려 절하며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여 돼지들에게 들어가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던 더러운 영 ‘군대’는, 돼지들이 호수로 달려가 빠져 죽음으로써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그렇게 이 부정한 지역에서 마귀의 세력이 사라지고, 이제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집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에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들의 고장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반면에 치유받은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열두 제자의 특징이고 사명입니다(마르 3,14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가족에게 알리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치유받은 이는 물러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자기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열 개의 도시, 데카폴리스 지역에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가 복음 선포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이민족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는 어떠한 경계나 제한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간에게 좌우되지 않는 비결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소낙비를 그대로 다 맞듯이 오늘 다윗은 저주의 비를 그대로 다 맞습니다. 

그런데 비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다 맞으면 그런 비는 어떤 비일까요? 재앙일까요? 은총일까요? 더럽힘일까요? 씻김일까요? 

고등학생 때 매우 감상적이었던 저는 비 맞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일부러 비를 맞았는데 그때 저는 제가 씨기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감정 샤우어를 한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죄가 씻기는 그런 느낌은 아니고 감정의 정화였던 것 같습니다. 

옛날 유행가에 '눈물을 감추고'라는 노래가 있었지요. 울고는 싶지만 눈물은 보이고 싶지 않아 비에 젖어 우는 내용입니다. 

가사 중에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쓰라린 가슴에 고독이 넘쳐 넘쳐 내 야윈 가슴에 넘쳐 흐른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노래 가사처럼 비에 젖으며 감정에도 젖었던 것인데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젖으면 다시 말해서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면 긍정적인 것이 되는 겁니다. 

은총도 내가 부정하면 부정적인 것이 되듯 재앙도 내가 긍정하면 긍정적인 것이 되고, 적어도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받습니다. 시므이는 분명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저주를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저주는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시므이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다윗에게는 전혀 저주가 아닙니다. 

저는 소음에 아주 민감합니다. 어디 가서 시계 소리가 나면 시계를 아예 떼어버리고 냉장고 소리가 들리면 냉장고를 꺼버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할 때는 쇳소리, 기계 소리가 엄청나도 소음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니 소음이 도무지 소음이 아니였습니다.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고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이렇게 됩니다. 저주도 거부하지 않으니 저주하는 사람만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한 인간의 행위로만 보지 않고 그 행위 뒤나 행위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불행이 인간에게 좌우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자신의 행불행을 의탁하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여기에는 나의 행불행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겠다는 의지도 있습니다. 

인간의 저주나 비난에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비결이 하느님께 완전한 의탁에 있음을 다윗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악령보다 무서운 것이 자아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서 군대라는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로마 한 군단은 6천 명이었으니,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악령이 들어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서 물에 빠져 죽은 돼지들만 2천 마리가 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마귀 군단의 압제에서 벗어난 사람은 온전한 모습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은 인물은 받아주시면서 이제 악령으로부터 깨끗해진 이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악령에서 해방되면 성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너무 쉽습니다.

저도 군대에서 죽은 귀신을 보는 군인에게 “그냥 안 보이는 척 하세요”라고 했더니 사흘 만에 그 귀신이 보이지 않게 된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악령이 그냥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잊고 악령을 더 무서워합니다. 게라사 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악령이 들린 사람을 휘어잡기 위해 쇠사슬과 족쇄를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린 사람은 그것들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게라사인들은 자신들 안에 그 악령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바로 ‘자아’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돼지 2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떠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악령에서 해방된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예수님은 악령에 대해서는 그 숫자에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시지만 자아가 자아내는 탐욕, 성욕, 명예욕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으십니다. 그냥 조용히 떠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무서운 자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악령이 걸려있는 사람보다 위험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섬뜩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 ‘파수꾼’(2011)입니다. 과연 학교 일진의 친구들은 행복할까요?

기태, 희준, 동윤은 절친한 친구입니다. 기태은 여자친구 세 명과 함께 월미도에서 미팅을 주선합니다. 희준이 관심 있는 보경은 기태에게 관심을 보이고 기태는 희준을 생각해 고백을 거절합니다. 보경이 기태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본 희준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빼앗는다고 기태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됩니다.

기태는 지금 다니는 학교에 일진이고 그런 기태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무척 예민한 부분이었습니다. 희준은 기태가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반응한다는 말을 흘리게 되고, 기태도 희준에게 망을 보라고 시키는 등 자존심에 상처를 입힙니다.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본격적으로 나빠집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동윤은 희준을 보고 이상함을 느낍니다. 기태는 희준을 가방까지 빼앗아가고 가방을 찾으러 온 희준의 뺨을 때리는 등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농락합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기태는 마음을 바꾸어 다음날 사과하러 희준에게 다가갑니다. 기태는 이제 그만하자고 사과하는데, 희준은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에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전학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좋은 이미지로 남기를 원했는지 기태는 전학하는 희준에게 셋의 우정과 추억이 담긴 야구공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합니다.

희준이 전학 간 뒤 기태의 폭주는 계속됩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말려보려 또 충고합니다. 기태도 이번에는 동윤의 여자친구 세정이가 건전하지 못하다며 동윤에게 충고하며 그런 충고가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지 알려줍니다. 세정이를 만난 동윤은 표정 관리를 못하고 헤어지자고 합니다. 이에 세정은 자신의 소문으로 인해 상처받고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찾아가고 그 소문에 있어서 자신이 그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을 세정이에게 말했느냐고 따집니다. 기태는 그런 오해를 하느냐며 어이없어합니다. 이에 동윤이 기태에게 먼저 폭력을 가합니다. 기태와 한 패거리들이 동윤을 둘러싸 때렸고, 기태가 일어나 그들을 말리며 동윤에게 그건 오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윤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기태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동윤의 집에 찾아갑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기태는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친구 동윤에게 한 번 더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동윤은 이렇게 비수가 꽂히는 말을 합니다.

“내가 네 진정한 친구다. 이해해 줄 사람은 나뿐이라고 지껄일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 줄 알아? 네가 역겨우니까 네 주변 애들이 다 너 떠나는 거야.”

“그래? 그게 내 모습이야?”

“어!”

결국,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떠나가자 기태는 자살하게 되고 결국 동윤은 그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청소년의 성장 이야깃거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이 힘이 세다는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역겹게 보인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태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기태는 항상 “이만큼 머리 숙이고 사과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자기 주도적인 관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힘과 권력, 명예나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없음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태는 원인도 모른 채 그냥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기태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게라사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얼 포인트’(2004)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인들이 귀신과 싸우는 내용입니다. 사실 귀신과 싸우기보다는 자신 안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귀신을 보느라 자신 안의 두려움을 보지 못한 이들은 다 죽어갑니다. 귀신은 결국 우리 안의 자아와 결탁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를 이기는 자는 귀신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꼭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그리고 그 자아가 만들어내는 삼구라는 욕구가 마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무서움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마귀는 쫓아낼 줄 알면서 그것보다 더 무서운 자아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귀는, 그것이 군단으로 있을지라도, 한 마디로 쫓아낼 수 있으셨지만 게라사인들의 탐욕에는 아무 힘도 쓰실 수 없으셨음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분노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요즘 가짜 뉴스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인데도 이를 굳게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연구진은 어떤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더 맹신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사람보다 분노를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 가짜 뉴스를 더 잘 믿고 더 쉽게 퍼트린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노하게 되면 더 쉽게 속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분노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분노하면 상대방만 보고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출발해서 역으로 과거로 들어가게 되면서 분노를 더 키우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분노는 매우 커졌습니다.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면서 불평불만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분노가 가짜 뉴스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맹신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분노를 하게 되면 얼른 그 분노를 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 내 분노에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 판단을 제대로 못 하게 할 뿐입니다.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와 구분할 힘도 잃게 됩니다. 
 
분노 없이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또 분노가 생겼을 때, 그 분노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분노에서 벗어나야 참 진리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진리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분노를 예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십니다. 더러운 영이 들어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구해주는 과정 안에서 재산 피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악령들이 돼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고장 사람들이 기르던 돼지들이 모두 호수 안으로 빠져 죽고 말았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시오.” 
 
아마 사람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더러운 영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의 피해만을 보면서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 사람이 건강해진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야? 왜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하는 거야?’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을 쫓아낼 수 있었을까요? 분노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혹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할 대상을 바꿔라. 화내야 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의 자제력이다.

- B.칼튼

 

 

헤르만 헤세의 멋진 글
'행복해진다는 것'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헤르만 헤세의 멋진 글입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은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그 행복을 찾은 사람만이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르 5,9)

 

사랑의 힘을 믿는다. 이름이란 소중한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거기에서 뿌리를 내린다. 열매는 그냥 맺히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기초와 기본을 가르쳐주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출발이 없으면 도착도 없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처럼 젊은이들의 교육은 우리의 미래이다. 신앙과 교육을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되풀이되는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은 건강한 사람이 되어간다. 

설레임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하는 사랑이 교육이다. 배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배움의 여정이 삶의 여정이다. 기술을 배우고 삶의 자세를 배우고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저마다 펼쳐나갈 잠재력을 깨우는 것이다. 

사랑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새생활이 시작되는 거기에 행복이 있다. 변화를 두려워말자. 교육이 있는 곳에 신앙이 있고 배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멋진 성장이 있다. 아픔 없는 성장은 없다. 

성장하는 부모 성장하는 자녀들이다. 성 요한 보스코의 사랑으로 교회는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사랑은 교육이다. 십자가로 가르치시는 주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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