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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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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5주간 금요일 -

 

 

2022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솔로몬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 내시어 그중에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아들에게 남겨 두실 것이라고 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어루만져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립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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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열왕 11장 29-32절, 12장 19절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였다.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고집 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제멋대로 제 길을 걸어갔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나 그들의 원수들을 당장 꺾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적들을 치리라.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7장 31-37절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11일 (금)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잘 전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어느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치유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 손가락을 그 사람의 두 귀에 집어넣으시는 모습, 당신 손에 침을 발라 그 사람의 혀에 대시는 모습,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는 모습, 그리고 “열려라!” 하고 외치시는 모습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치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그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던 우리의 귀는 닫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분께서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 손가락을 두 귀에 넣어 말씀이 들어갈 통로를 마련하시고 “에파타!”라고 외치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분의 말씀을 구원의 말씀으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묶인 혀에도 몸소 손을 대시어 우리가 알아듣게 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영적인 귀와 입을 손수 열어 주셨습니다. 잘 알아듣고 제대로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잘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손수 열어 주신 귀와 입을 어쩌면 우리 스스로 다시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 말씀을 더 경청하고 더 선교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능력과 사랑의 주님

 

오늘 복음을 읽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왜 장애인을 따로 데리고 나가 은밀하게 치유하실까? 

다른 경우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셨고,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에서 "열려라"는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따로 데리고 나가 치유의 동작들을 이것저것 하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왜 굳이 당신의 침을 장애인의 혀에 대는 불결한 행동을 하실까? 

물론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이 굳이 일부러 그러시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은 다름아닌 은밀한 사랑 곧 밀애를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귀에 손을 대고, 혀에 침을 바르며, 한숨을 토해내시는 행위 등은 더러운 행위나 밀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밀애적인 행위이고, 그런 행위가 이 장애인에게는 필요했던 것일 겁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키스를 하고 사랑을 할 때 침은 내게 더럽지 않듯이 아기를 사랑하는 어미가 밥을 씹어 아기 입에 넣어주면 더럽지 않듯이 주님의 행위는 사랑의 행위지 더러운 행위가 결코 아니지요. 

침이 더러울 때는 사랑이 없을 때이고, 적개심과 모욕과 분노의 표시로 침을 상대에게 뱉을 때 더러운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건조하게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인 침을 장애인 입에 집어넣으시어 치유하십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2장에서 당신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시어 당신의 목숨을 넣어주신 것처럼 저에게는 보이고 "열려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 "생겨라"는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이 생겨난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고,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의 숨은 사랑의 숨이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치유는 당신의 능력뿐 아니라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고, 구원의 행위일 뿐 아니라 재창조의 행위임을 고밥게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하는 이의 나이가 말의 품격을 좌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들은 손을 얹어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군중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분명 말에는 그 힘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한 마디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지녔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쩐지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고 하고 부모도 자녀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세상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과 같은 말에 찔려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아파트 주민은 경비원 아저씨에게 “개처럼 짖어봐!”라고 하며 그런 분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멜 깁슨이 나오는 영화 ‘포에버 영’(1992)의 주인공 대니얼은 공군 조종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사귀는 여인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그렇게도 못합니다. 폭탄을 투하하는 용감한 군인임에도 결혼하자는 말 하나 그렇게 투하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 얘기만 하면 갑자기 목이 굳어지고 혀가 뻣뻣해져서 딴소리만 하는 꼴이 되고, 그저 매일 ‘내일은 꼭 해야지’하는 한심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합니다. 헬렌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일보 직전이 된 것입니다. 대니얼은 할 말을 못 한 채 혼자 세상에 남았습니다. 헬렌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대니얼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친구가 비밀리에 실시하는 냉동 인간 실험에 참여합니다. 어찌어찌하여 대니얼이 깨어난 것은 50년이 지난 1992년이었습니다. 물론 노년에 헬렌이 살았음을 알고 그녀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지만, 왠지 너무 늦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50년 뒤의 대니얼은 뒤늦게나마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50년 뒤에 깨어난 그는 당시 어른들과 어울리기에는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지식밖에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하고 놀아주는 사람은 어린이들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수준이 50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이처럼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더 잃을 게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처음 대니얼이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여 50년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존심은 곧 교만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겸손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낮아졌을 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폭탄을 투하할 조종사일 때는 교만하여 그 자존심 때문에 타인에게 어쩌면 피해를 주는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되었을 때는 더는 잃을 것이 없으므로 힘 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기 위해 하시는 모든 행위는 바로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고 작아지고 어려지는 행위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인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참 아드님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곧 ‘성령’입니다. 어린이처럼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이들은 그들이 그 과정에서 흘리는 피와 함께 성령의 힘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말할 때는 그 성령의 힘 때문에 능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물로도 표현되고 바람으로도 표현되며 손가락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병을 고치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성령으로 치유하시는 상징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귀를 막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도록 이끄시는 힘입니다. 

세계 최초로 서예 크로키라는 장르를 개척한 석창우 화백의 그림 입문 계기는 순전히 아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서른 즈음 전기 기사 시절에 2만 3천 볼트의 감전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두 팔과 발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두 팔 없는 삶과 두 팔 있는 삶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팔 있던 삶 30년, 팔 없는 삶 30년입니다. 저는 둘 중에 팔 없는 삶 30년이 더 행복합니다.”

지금은 가톨릭 성경을 의수에 붓을 끼워 필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절망의 그에게 이런 희망의 선물을 주었을까요? 그의 4살 아들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네 살 난 아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천진한 표정으로 “아빠, 새 그림 그려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아들의 말 한마디에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아마 아들의 이 한 마디의 힘이 커서 하느님 말씀을 필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순수해서 아빠를 무작정 믿고 사랑합니다. 그 말이 아버지에게 들려오는 세상과 자아의 부정적인 목소리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아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들의 말이 아버지를 “에파타!” 하게 만든 것입니다. 내 심장이 먼저 열리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도 열 수 없습니다. 

작아집시다. 작은 이의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많은 CEO가 자신과 함께 일을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웨이터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한 웨이터가 실수로 손님의 양복에 와인을 쏟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봉변을 당한 손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아침 바빠서 샤워를 못 했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죠? 허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IT 업체 CEO인 데이브 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수한 웨이터를 웃음으로 용서하는 것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어요. 저는 그와 즉각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와인 세례를 받고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을 한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힘이 있습니다. 힘이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가슴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해, 너 당장 해고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에 피가 섞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모기나 기생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탄을 투하하며 다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의 품격은 말로 금방 드러납니다. 어린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말하느냐, 아니면 큰 어른처럼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의 품격을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나 나라가 어떤 모습이 될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에파타!

 

몇 해 전, 아는 지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것도 20대의 젊은 아내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2세(아기)까지 갖게 되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능력 있네.”, “아이고, 주책이야.” 
 
역사 안에서도 큰 나이 차의 사랑을 갈구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괴테는 72세에 19세의 소녀에게 청혼했었던 사실로 매우 유명하지요. 현대에도 큰 나이 차의 결혼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24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큰 나이 차의 결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물질적인 것들을 포함해서 외적 이유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큰 나이 차를 극복할 수 있게 하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합니다.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많은데도 사랑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지려는 것 같습니다.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80세의 할머니에게 “여성은 몇 세에 욕망이 사라집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난 겨우 80세밖에 안 되었는데….” 
 
욕망이 사랑지지 않듯, 사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를 군중에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행동과 말로, 유다인들은 이를 마술 행위로 금지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고쳐 줄 수 있으셨을 텐데, 왜 금지하는 행동까지 하시면서 고쳐 주셨을까요? 이교도들의 예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갓난아기를 보면 너무 예뻐서 안아주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고, 깨물어주고 싶지 않습니까? 갓난아기는 이런 행동들에 사랑을 느낍니다. 또 이를 보는 사람들도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만들어가면서 사랑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언제나 초심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맛본다.

- 조셉 골드 스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열려라! (마르 7,34)

 

버릴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다. 헤아리지 못한 아픔을 진정 알고 아픈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랑의 날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분명 사랑이다. 아픔과 사랑의 여정을 동시에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생명이 있기에 아픔이 있다. 아픔을 통하여 정직한 사랑을 다시 배우게되는 아픔이다. 아픔에 눈 감지 않고 아픔을 만난다. 아픔을 위로하시고 아픔을 치유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람의 사랑이 아픔을 끌어안는다.

사람의 도움없이는 살 수가 없는 우리들이다.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처럼 열려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아픔을 주님께 맡겨드린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픔이 있고 사랑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괴롭고 아픈 우리들의 고통을 치유하여 주신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씩 하나씩 열어주신다. 나눔도 사랑도 열리는 그만큼 치유가 된다. 우리들 닫힌 마음과 몸을 주님 사랑으로 활짝 열어주소서! 그리고 병든 데를 온전하게 치유시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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