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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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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6주일 -

 

 

2022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고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3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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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예레 17장 5-8절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1코린 15장 12절, 16-20절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17절, 20-26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인석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2월 13일 (일)
여인석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나는 무엇을 더 신뢰하고 무엇에 더 의지하고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동경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유함이 행복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가뜩이나 힘들어진 요즘 같은 시기에 솔직히 돈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것은 도통 만족을 모르는 듯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있어야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대개 지금 자신이 보유한 자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자산이 더 많아지면 그때 가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으로 행복해지는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도 아이러니하게 돈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하고 굶주리면 행복하지만, 부유하고 배부르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가난은 불행, 부유함은 행복’이라는 공식을 뒤집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재설정해 줍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나는 무엇을 더 신뢰하고 무엇에 더 의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신뢰하십니까? 돈의 힘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힘입니까? 도무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돈보다, 존재만으로 충만하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는 이미 신앙생활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 고차 방정식을 풀어주시는 주님

 

오늘 제6주일은 행복과 불행이 주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행복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여 루카 복음은 행복과 불행에 대해 다 언급하고 첫째 독서도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를 얘기하잖습니까? 

이 행복과 불행에 대해 성찰하면서 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은 정도로 행복을 살까? 하는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인간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인생의 목적이기에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살 텐데 그 길을 모르기에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릅니까? 그것은 행복의 구조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고차방정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만족의 상태이고 두루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두 만족스러워야지 어느 하나라도 만족스럽지 않고 불만이 있으면 그 하나의 불만으로 인해 우린 전체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족에는 크게 세 가지 류의 만족이 있습니다. 소유의 만족이 있고, 일의 만족인 보람이 있고, 관계적 만족인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또다른 류의 만족들도 있습니다. 성취적 만족인 기쁨이 있고, 행위적 만족인 즐거움이 있으며, 상태적 만족인 편안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만족의 가짓수가 많으니 다 충족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만족들이 얽히고 설켜 충돌과 갈등을 유발하기에 행복은커녕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만족의 가짓수도 문제지만 질도 문젭니다. 만족이란 욕구와 욕망과 욕심의 충족인데 이 욕구가 욕망과 욕심으로 발전하면서 그 욕망과 욕심의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더를 바라는 것이 욕망이고 욕심이며 그래서 욕망과 욕심은 늘 그 허기를 느끼고 불만을 느끼기 만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만족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누가 그 길을 다 알고 있고 누가 그 많은 만족을 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교는 다 자기에게 달렸다고 합니다. 곧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니 욕심을 버리든 수행을 하든 다 자기가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다고도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사람에게 달렸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달렸다고 합니다. 

자기가 그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없고 다른 인간도 그 많은 만족을 채워줄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그 모든 것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하느님께 의지하는 인간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지만 인간에게 의지하는 인간은 사막에 심어진 나무같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것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하지만 이것을 믿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며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인데 이것을 믿습니까? 행복의 고차방정식을 풀어주시는 주님께 의탁하여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은 사랑해서 하는 고생이다.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을 못 박는 것은 ‘가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십니다. 육신을 못 박는 방법은 절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조롱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으며 웃지 맙시다. 울게 될 날이 있습니다. 

오늘 행복선언을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은 사랑 때문에 고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인생을 깨우친 이들은 누구나 같은 행복론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행복하려고 열심히 사는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고생은 하는데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린 왕자’를 한 번쯤은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B612라는 작은 별에 삽니다. 어린 왕자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 한 송이 꽃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의 행동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임없이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결국,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 별에 뿌리내린 꽃을 떠난 것입니다. 

첫 번째 도착한 별에는 위대한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왕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기에 외로워짐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두 번째 별에는 허풍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손뼉을 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박수받을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세 번째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습니다. 술꾼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왜 마시냐고 물었더니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또 부끄러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왕자가 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계산기만 두드리고 장부 정리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중대한 일을 하는 가치 있고 정확하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소유한 별들을 잘 관리해서 그것으로 다른 새로운 별들을 사는 것뿐, 그 별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별은 매우 작았는데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 켜는 사람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의 명령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가로등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별이 1분에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1분에 밤낮이 반복되어서 쉴 시간이 없습니다. 좀 쉬면서 하라는 어린 왕자의 말에 “내 평생에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거야”라고 말하며 계속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합니다. 

여섯 번째 별은 넓은 별인데 나이 든 지리학자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 별에 살고 싶은 어린 왕자는 그 별에 강과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지리학자는 자신의 별을 단 한 번도 탐험해 보지 않아 모른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리학자지 탐험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별이 지구입니다. 지구란 그동안 만났던 왕과 지리학자, 사업가와 주정뱅이, 허풍쟁이와 가로등 켜는 단순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 설정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이 열심히 고생하며 사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다가 이젠 왜 버는지도 모르고 그냥 출근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고생은 하는데 덜 행복합니다.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다가 이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는데 일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게 항상 고생하고 남는 건 없고 항상 공허하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리 고생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귀한 친구 둘은 여우와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여우는 길드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항상 4시쯤 오는 노력을 하면 여우는 3시부터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 꾸준히 십자가를 져 달라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함을 알게 되면서 자기 별에 홀로 남은 장미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부족했기에 십자가가 힘들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사는 어린 왕자가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그림을 그려줍니다. 바로 양입니다. 조종사는 사막에서 빠져나가기도 어려운데 어린 왕자가 귀찮았지만, 그와 친해지며 사막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어린 왕자를 위해 그림을 그려준 고생이 행복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외톨이로 살던 그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생을 합니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듯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고생이 헛것이 됩니다. 또 사랑만 외치는 이도 있습니다. 처음의 어린 왕자처럼 사랑은 없는데 자신만 고생한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니 고생하는 게 너무 싫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관계의 단절과 외로움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들로 키워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맞아야 하는 엄청난 가르침을 말했다가는 아이들이 다 도망가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위해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함은 알려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햄스터를 처음 키울 때 햄스터를 참으로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햄스터의 죽음, 곧 진정한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때 햄스터를 사랑한 것일까요. 햄스터가 내 곁을 떠날 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사랑스러워 십자가를 져 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햄스터를 사랑하는 것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상대 때문에 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내 곁을 떠나고 자녀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자녀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질 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나중에 자녀를 통해 어떤 덕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십자가를 버렸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어떻게 마음에 드는 일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해

 

직장에서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참 더럽다’라는 말을 직장 동료들이 뒤에서 많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 형제님이 드디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은 아주 잘하지만, 화를 많이 내는 직장 상사의 은퇴 소식에 모두 좋아했습니다. 
 
이 형제님은 은퇴 후 가죽공예를 배웠고 후에 공방까지 열었습니다. 그런데 공방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 형제님에 대한 평가가 이상합니다. 화를 전혀 내지 않고 언제나 다정다감한 유쾌한 ‘천사’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전 직장 동료들은 이 형제님에게 왜 이렇게 성격이 변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형제님은 “내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래.”라고 웃으며 답하시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주로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 마음에 드는 일을 하게 되면,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에서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조건도 좋기 때문입니다. 
 
만약 화가 많은 자신이라면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어떻게 마음에 드는 일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질적인 만족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길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8가지의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루카 복음은 4가지 행복론에 짝지어 4가지 불행론이 뒤따릅니다. 루카 복음의 행복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고, 박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이라고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좋은 일, 마음에 드는 일로 받아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제1 독서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굶주리고 있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운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박해받고 있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무조건 행복합니다.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산다.

- 이해인 수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루카 6, 21)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행복이다. 행복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다. 모든 행복의 시작은 행복의 주님이시다. 행복한 사람 예수님께서 진짜 행복을 가르쳐주신다. 행복이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진실한 울음이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참된 행복도 없다. 행복과 슬픔이 교차하는 우리들 삶에서 행복을 다시 일깨워 주신다. 행복은 삶처럼 멈추어 있지 않다. 멈추어 있지 않기에 서로를 향한다. 

행복도 철이 들어야 한다. 생활의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이다. 조금씩 조금씩 삶을 사랑하게 되는 행복이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삶의 자세인 행복이다. 우리가 사람임을 아는 행복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의 하루이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계신다. 행복은 생활의 반성에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행복의 방향이 주님께로 향한다. 

행복은 주님과 함께 울다가 주님과 함께 웃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은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안다. 끝내 자녀들이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행복과 창조 사람과 행복은 하나이다. 행복하다. 행복은 사랑의 마음이다. 이 사랑의 마음을 나누고 드리는 행복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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