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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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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2022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실천으로 완전해집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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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2장 14-24절, 26절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8장 34-38절, 9장 1절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심상엽 요엘 신부 집전

 

 

2022년 2월 18일 (금)
심상엽 요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에서 ‘야고보 서간’을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은 무엇보다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데, 행동과 실천이 붙따라야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주제의 핵심 단락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오늘 말씀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지금껏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에 관한 수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참으로 실천하며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경우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초주검이 된 사람을 온 정성으로 돌본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29-37 참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나’와, 정작 길에서 비슷한 처지의 궁핍한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쳐 버리는 ‘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당신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결국 말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삶, 곧 행동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어제 믿음의 부자에 대해서 얘기한 야고보서는 오늘 죽은 믿음, 쓸모없는 믿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자 즉시 떠오른 것이 여호와 증인을 믿는 청년들의 양심적인 병역 거부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믿음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에 따른 불이익과 박해와 고통을 감수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믿음은 그들의 삶과 실천에 있어서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으며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옳은 믿음이냐 아니냐를 떠나서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옳다고 믿는데 그렇게 믿으면서도 그 믿음의 작동이 그들보다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그들보다 나은 믿음이고 옳은 믿음일지라도 고장 난 기계처럼 우리의 삶과 행위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옳은 믿음인지 몰라도 살아있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것을 요즘 신학의 실천적 무신론과 연결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믿기는 하는데 실천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실천적 무신론이지요.

다시 말해서 주일 성당에서는 믿는다고 하지만 성당을 나와 살면서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래서 하느님이 없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돈과 욕망을 쫓아 살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지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지 하느님이 안 계셔서 불행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복에 하느님이 전혀 상관이 없으면 하느님 계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죽은 믿음이란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믿음을 왜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까?

마음의 위안을 위해?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아니고 죽고 난 뒤를 위해?

그러므로 살아있는 믿음이란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거나 '믿는 사람이 우리와 다를 거 없네'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우리의 삶과 실천에 하느님이 살아있고, 그래서 믿음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지금 우리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결국 죽는 사람은 미지근한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죽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존’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죽으려 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 사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말은 이웃의 생존을 위해 내 생존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은 삽니다. 록펠러는 인생의 절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돈으로 이름 모를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대줌으로써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몸도 건강해져서 90세 넘게 살았습니다. 

죽으려 한다는 말은 나의 생존을 위해 모으는 것을 다른 이의 생존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록펠러에게 수술비를 지원받은 여자아이가 쓴 장문의 감사 편지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되찾아준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으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1987년 ‘로버트 네렘’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표준 토끼 모델’이라는 간단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환경에서 토끼들에게 고지방 식단의 사료를 먹이고 마지막 단계에서 토끼들의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박동수, 혈압 등을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콜레스테롤 수치는 모두 같이 높았습니다.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일으킬 확률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별 기대 없이 토끼들의 미세혈관을 관찰하였습니다. 네렘 박사는 토끼들의 동맥 안쪽에 비슷한 지방 성분이 쌓여있으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토끼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 무리의 토끼들은 다른 토끼들보다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60%나 적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라며 원인을 찾았지만 이 결과를 설명할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네렘 박사와 팀원들은 단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방이 덜 쌓인 토끼들은 최근 그의 연구에 합류한 ‘무리나 레베스끄’가 돌본 토끼들임이 밝혀졌습니다. 레베스끄가 토끼들에게 사료를 줄 때 다른 연구원들이 주는 것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토끼들에게 사료를 주며 말도 걸었고 종종 껴안고 쓰다듬었으며 토끼들을 귀여워해 줬습니다. 사랑을 준 것입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애정이 어떻게 물질적인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것은 과학자로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실험 조건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레베스끄가 돌보는 토끼들과 그냥 사료만 준 토끼들의 동맥을 다시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 결과를 세계적 권위의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등재하였습니다.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 토끼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안아주고 애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식단에 따른 많은 부작용이 사라졌습니다. 사람과 토끼가 맺은 관계가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물질은 물질이고 애정은 애정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의사와 과학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은 분명 있고 이것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하는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줄 때 받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레베스끄라고 하더라도 징그러운 파충류를 두고 실험했다면 그만한 사랑을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인데 내가 먼저 사랑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웃을 모기처럼 빨아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죽어가고 죽어서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는 법을 배워 영원히 사는 천국으로 향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이 죽어 사랑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으로 죽기를 거부할까요? 왜 스스로 죄 많은 사람이 되어 죽는 길로 가는 것일까요? 왜 남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주면 바보 소리 듣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사랑으로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고 전해야 합니다. 두 방향밖에 없습니다. 살려고 하든, 죽으려고 하든. 

이 단순한 진리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살려고 하면 결국 죽는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보통 그런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방향을 잡으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만있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 위에 가만히 있으면 바다로 흘러가 영원한 미아가 됩니다. 

현재 유튜브판 ‘골목 식당’을 운영하는 ‘장사의 신’이란 채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주인공은 은현창 대표입니다. 

그는 가난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언제 물이 집으로 흘러들어올지 몰라 항상 망을 보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항상 돈이 없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자장면 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 제대하고는 곱창집을 하였습니다. 당시 곱창을 배달하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곱창을 배달하겠다는 아이디어로 대박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한 가게에서 버는 돈은 한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프랜차이즈를 하자니 곱창을 표준화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랜차이즈가 쉬운 치킨집에 도전합니다. 처음엔 손님이 너무 없었습니다. 혼자 튀기고 전화 받고 배달하며 단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입소문이 나고 많은 수의 프랜차이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게도 망하지 않고 다 잘 팔리는 치킨 프랜차이즈를 만든 것입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병이었습니다. 비만 오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온종일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때 프랜차이즈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팔 생각이 없었지만, 몸이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팔았습니다. 그의 통장에 찍힌 액수는 ‘200억’이었습니다. 이 숫자를 보는 순간 그가 기뻤을까요? 

“이게 다야?” 

대부분 성공만 바라며 뛰어온 사람들이 느끼는 허탈감입니다. 모래성을 공들여 평생 쌓은 것입니다. 그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백종원’ 씨가 하던 골목식당과 같은 프로를 자신의 장사 경험으로 무료로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자신에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장사가 안되는 집들의 코치도 해 주고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가게에서는 수백만 원어치를 팔아줍니다. 그는 웃으며 말합니다. 

“유튜브 수입, 내가 이래서 맨날 적자야!” 

장사꾼이 적자를 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 끝까지 가보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돈을 벌었다가, ‘아, 이건 아니지!’라고 하며 다시 남을 위해 살려고 했다가, ‘아, 이러면 우리가 굶어 죽겠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한다면 나만을 위한 삶이 나를 죽인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던지 죽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벌든지 이웃을 위해 살든지 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려고 했다가 평생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방향을 확실히 정합시다.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죽도록 일하던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살던지. 결국, 죽는 사람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이 아니라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입니까?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어떤 분으로부터 ‘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워낙 무엇을 키우는데 재주가 없어서 각종 화초를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대로 키워보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책을 사서 난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배운 대로 난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서 매일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정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매일 닦아주면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정성을 기울이다 보니, 난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변화도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잎이 자라는 것도 보였고, 잎에 약간의 이상이 보이면 마치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이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난이 제게 무엇을 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도 무엇을 줘야지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성을 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려면 먼저 알기 위해 노력하고 여기에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만 외치는 공허한 사랑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잘 따르려면 어떤 조건을 채워야 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가져야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를 때 세상의 목숨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부와 명예를 좇아서 하느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의 뜻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과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 2,26)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선 그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이 재능입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뛰지도 않으니까.

- 이마무라 쇼헤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5)

 

꽃도 꽃망울로 시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피 흘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십자가의 목숨이다. 참된 사랑에는 십자가의 목숨이 있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 목숨으로 목숨을 구하는 복음이다. 

목숨의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복음의 길이다.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를 돌보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된다. 누군가의 사랑에 빚진 우리들 목숨이다. 목숨은 십자가를 만난다. 

참된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알게되는 사랑의 복음이다. 사랑은 꽃길이 아니라 끝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다. 목숨을 내놓는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십자가 없이는 목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서로를 구하는 변화의 시작에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삶이 있었다. 십자가는 삶의 변화이며 목숨은 목숨에 갇혀있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힘겹게 밀어 올리는 십자가의 삶에서 다시 삶을 만나고 다시 사랑을 찾는 빚진 목숨들의 기도가 있다. 

길을 잃은 목숨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은 목숨의 길을 알려준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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