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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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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6주간 토요일 -

 

 

2022년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람은 절제할 수 없는 혀로 큰 불을 낼 수 있다. 야고보는 이를 불의의 세계로 정의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부활을 드러냅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앞으로 예수님께서만 권위를 가지실 것임을 보여 줍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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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3장 1-10절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소서.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충실한 이는 하나도 없고, 진실한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 버렸나이다. 저마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두 마음 간사한 입술로 말하나이다.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소서.

주님은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말을 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 그들은 말하는구나.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이 우리 것인데 누가 우리의 주인이랴?”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소서.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시고,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호하소서.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9장 2-13절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19일 (토)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베드로가 놓친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그들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엘리야와 모세도 그분 곁에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서 그들에게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베드로의 이 제안은 이스라엘의 초막절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광야에서 지냈던 천막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은, 마지막 때가 오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초막에서 살게 되리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도 반영하는 축제였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왜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광경을 보고 지금이 바로 그 종말의 때임을 직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수난을 강조하셨는데(마르 8,31 참조), 종말의 때에 이르기는커녕 아직 수난의 때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앞의 놀라운 광경에 정신이 팔려 이를 잊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한 번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마르 8,33 참조) 여전히 수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이 가르침을 멀리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드러내신 영광은 수난의 여정 끝에 궁극적으로 맞이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하며, 그분께서 초대하신 십자가의 길이 결국 패배가 아닌 승리의 여정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치 혀로

 

믿음의 실천을 얘기하는 야고보서는 이제 혀를 잘 다스려야 함을 얘기합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말에도 말을 잘해야 함을 얘기하는 뜻으로 말 한마디에 원수도 되고 천량빚도 갚는다고도 하고, 혀를 굳이 '세치 혀'라고 하여 혀의 짧음을 얘기하며 그러나 그 세치 혀로 큰일을 내기도 하고, 이루기도 하니 세치 혓바닥을 잘 놀려야 한다고 얘기하고는 하지요. 

그런가하면 중국말엔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宇라는 말이 있는데,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고 혀는 제 몸을 베는 칼이기에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어 두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는 세치밖에 안 되지만 그 위력이 대단하여 우리는 세치 혀로 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고 뒷담화로 한 사람을 매도하거나 매장하기도 하며 감언이설로 남을 속이거나 이간질로 공동체가 쪼개지게도 하고, 다된 밥에 코빠트리듯 기껏 잘해놓고 말 한마디에 일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말 실수라는 것이 단순히 입이나 혀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의 표출이고 그의 됨됨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고작 입과 혀를 단속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본래 단속이라는 말이, 새나가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묶는다는 뜻인데 그러므로 혀를 묶을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이나 의식이 안에 차게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정신을 차린 다음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겠지요. 

그것은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며 안에 있는 것은 아무리 단속해도 새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을 무엇으로 채우고 존재를 어떻게 갖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안이 미움과 악과 독과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을 해치는 독을 뿜어내는 뱀처럼 독설과 저주와 감언이설과 온갖 쓰레기같은 말을 쏟아내겠지요. 

그러나 안이 사랑과 선과 거룩한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에게 이로운 젖을 주는 소처럼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치유의 말, 올바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축복의 말, 일치의 말로 한 개인과 공동체를 살릴 것이고, 하느님께는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기도를 바쳐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변모할 수 없을까?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모습이 변모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변모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사탄이라고 혼쭐이 납니다. 그러시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복음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다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복음을 위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사람 중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며 오늘 변모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변모는 하느님 나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고 변모할 수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이유는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당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천막 셋을 짓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삼위일체의 구원 신비를 나타냅니다. 혼자 세상을 창조하시거나 혼자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마치 모세와 엘리야처럼 양손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율법을 주었기에 진리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 곧 은총을 불러 내리고 그 불에 휩싸여 하늘로 갔기에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마치 아버지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은총과 진리를 제자들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삼위일체 상징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 삼위일체 신비가 이루어질 때 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재활학과 의사인 이승복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와서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난도 기술은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져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사지 마비라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을 받습니다. 그는 9개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 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로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게 맞는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분명 그에게서 말뿐이 아닌 진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그는 의사가 되어 겨우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절망적인 아이에게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이렇게 나눕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터득한 십자가 진리를 모세라는 상징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먼저 죽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승복 씨가 먼저 그 고통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힘내라는 말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꽃게를 생으로 무쳐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왼쪽 다리까지 잘라내어 절망에 빠져있던 한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납니다. 김치를 조금만 먹으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겠다는 그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 다음날 어머님께 부탁한 김치볶음밥을 도시락으로 싸 와서 아주머니에게 전달해 줍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술 이후로 ‘어떻게 하면 빨리 죽어버릴까?’ 그 생각만 했는데, 김치볶음밥을 먹고 나니, 이 맛있는 걸 두고 내가 왜 죽나 하는 생각이 드네. 이제 안 죽을래요. 닥터 리도 휠체어 타고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몇 주 후 아주머니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씩씩하게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아주머니는 닥터 리를 찾아와서 어머니 갖다 드리라며 찹쌀떡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닥터 리가 내어준 은총입니다. 은총은 죽어서 흘려주는 피와 같습니다. 그는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며 김치볶음밥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어줍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것과 같습니다.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말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변모는 곧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성령으로 우리를 구하시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예수님의 살과 함께 진리를 상징하고 물은 성령의 은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옆구리가 찔려야만 나오는 창조의 두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입어야만 재창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 옳았음을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버지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은총과 진리를 흘려보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나의 변모는 그런 삶을 살았을 때 주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때 완성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까지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필 왜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가셨을까요? 그들이 또한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 첫 순교자입니다. 아버지의 첫 피 흘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피 흘림으로 오시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하느님 나라 열쇠,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 명이 또한 삼위일체 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의 신비로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어 변모를 기다리는 신비를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짜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해

 

요즘 고등학교 다니는 남학생 중에는 이마에 여드름이 나면 학교가 아니라 피부 관리샵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자신을 온전하게 볼 수 없습니다. 즉,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부를 가꾸고, 멋진 옷을 입는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시 말해 남을 위해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또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할 때 거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사랑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은 사랑인 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이타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에 집중합니다. 사랑의 실천 자체에 기쁨을 얻지, 남의 평가에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전합니다. 태양과 빛의 찬란한 광채는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옷조차도 새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하면서 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베드로가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잊은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의 사명을 잊고, 그냥 영광 안에만 머무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였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예수님의 사랑은 편한 곳에 머무는 사랑이 아닙니다. 또 보여주기만을 위한 화려한 사랑도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어떻게 틀렸는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늘 틀리기 때문이다.

- 마크 맨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마르 9,2)

 

삶의 모든 시간은 변화의 시간이다. 이제 머지않아 메마른 겨울 가지에서 봄꽃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믿는 것을 실천하는 변화의 시간이다. 변화는 수난을 동반한다. 수난을 통해 비로소 맞이하는 변화의 삶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변화의 기쁨이다. 

복음은 참된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변화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변화이며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신비이다. 변화의 생명력은 실천에서 온다. 이 모든 것은 수난을 통하여 변화된다. 수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변모의 시작이다. 

십자가가 변화이다. 사랑은 참된 실천이다. 변화의 여정에 너와 내가 있다. 십자가는 땅에서 시작하지만 하늘을 향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가르쳐준다. 변화는 초막을 짓지 않는다.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가는 여정이다. 광야의 여정을 거치고 십자가의 여정을 거치는 것이다. 

예수님과 십자가 사람과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거룩한 변모의 울림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십자가가 탄생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빛나게 한다. 십자가가 모든 은총의 핵심이다. 그 십자가를 당신 여정으로 보여주신다 십자가가 삶의 정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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