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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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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2주일 -

 

 

2022년 3월 13일 사순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이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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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15장 5-12절, 17-18절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주님, 당신을 생각하나이다.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를 돕는 분이시옵니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필리 3장 17-21절, 4장 1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9장 28ㄴ-36절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영광스러운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감사하며 비오니 저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3월 13일 (일)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의 변모

 

루카 복음서는 거룩한 변모 사건에 앞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9,18-21 참조),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9,22 참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방법(9,23-27 참조)을 전해 줍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순서는 마르코 복음과 마태오 복음의 전개 구조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질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통하여 당신의 정체를 알려 주시려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고난을 겪는 메시아의 정체가 제자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변모 사건을 통하여 또다시 제자들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동안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있던 옷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9,29 참조). 예수님께서는 변모 사건으로 당신의 영광, 곧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드러날 순간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변모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고통스러운 죽음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9,31)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을 통하여 아버지께 가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변모로 드러난 예수님의 신분을 입증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영광이 우리가 이미 누리거나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의 빛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십니다(필리 3,21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십자가의 친구로

 

오늘 1독서와 복음은 신비 체험을 한 아브라함과 제자들 얘기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미리 체험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왜 미리 체험하게 하실까요? 죽으면 어련히 보게 될 하늘나라이고 그때 보면 될 것을 왜 미리 보게 하실까요? 오늘 베드로 말처럼 땅에 내려갈 생각은 않고 계속 거기 머물라는 뜻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님은 이 산에서 내려오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신비를 보여주신 뜻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슴에 안고 수난의 현장으로 가라는 뜻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일 겁니다. 

신비 체험이 없고 그래서 그 신비를 가슴에 안고 살지 않으면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것입니다. 신비를 가슴에 안아야 등에 십자가를 질 수 있는데 신비를 가슴에 안지 않으면 십자기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자기의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사람인데 여기서 배란 막말로 하면 200주년 성서의 번역처럼 배때기이고, 위를 채우거나 욕심을 채울 때의 그 배입니다. 

우리는 위를 가득 채웠을 때 배불리 먹었다고 하고, 욕심을 가득 채웠을 때도 배를 채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식욕을 비롯하여 모든 욕망을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며 우리가 사순 시기에 하느님을 새로이 모시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포식을 하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을 인생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시편을 모를 겁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수치'란 '배'처럼 성서학적으로는 다른 뜻 곧 할례를 자랑삼음을 뜻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영성적으로 다르게 이해하면 십자가 지는 것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김으로써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코린토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라고 얘기했지요.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땅에서 하늘을 사는 것'과 반대입니다. 하늘은 쳐다보지 않고 그저 땅에 돈이 떨어져있나 보듯 그저 세상만 보고 삽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과 연결시킬 때 십자가의 원수는 정반대의 두 원수입니다. 하나는 땅만 보는 원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만 보는 원수입니다. 땅만 보는 원수는 오늘 필립비서가 얘기하는 세속적인 사람이고, 하늘만 보는 원수는 오늘 베드로처럼 현실 도피적인 하늘바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사는 사람은 앞서 얘기했듯이 하늘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하늘 시민인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이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 안에 또는 주님 앞에 굳건히 서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로 얻는 믿음 : “괜찮다, 사랑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올라보면 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별것도 아닌 일에 아웅다웅하며 살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사십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에덴동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오르는 방법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 곧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엘리야는 성령,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충분한 사랑을 주면 자녀는 생존 걱정을 내려놓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집착이 작아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께 은총과 진리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괜찮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면 주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기도하면 또 엘리야도 보내주십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사랑한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측에 따르면 2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분당보다 넓은 크기의 1조 5천억 원짜리 궁전을 짓고 있고 자동차와 비행기 등은 수천억 원씩 개발비를 투자한 특수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100세까지 대통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법을 개정하며 계속 대통령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고 국방력과 경제가 나아졌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제가 좋아진 기업들의 많은 주식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기와 같이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틴이 어렸을 때 ‘생존의 문제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아니면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지금 생존의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고 빈민 공용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며 유도와 같은 운동을 하고 소위 불량배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였는지 당시 강한 권력을 지녔던 소련 정보부 KGB에 들어갑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 곁에서 정치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뇌물수수 등 비리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옐친 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결국엔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법을 개정하며 20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인지도가 점차 하락하자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미지 전환을 꾀한 것 같습니다. 

푸틴은 히틀러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아버지의 엄청난 기대와 그게 미치지 못할 때 행한 무자비한 폭력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푸틴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힘과 재산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살아남아야 하는 마음은 대통령을 그리 오래 해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푸틴이나 히틀러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랄 때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가 결합한 것입니다. 양식은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양식을 먹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아버지에게 이 양식을 먹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책임질 테니 죽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야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 때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타볼산에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1달러 프로젝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페이팔을 큰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돈이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양이었습니다.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루 1달러, 한 달 30달러로 생활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냉동 햄버거를 사서 30일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와 조금 먹을 것만 있으니 행복했습니다. ‘하루 적어도 1달러는 벌겠지!’라는 생각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푸틴도 최고 부자고 일런 머스크도 최고의 부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생존이 두려워 모으는 사람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자해서 부자가 된 사람과는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일런 머스크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를 위해 인터넷망 시스템을 공급하였습니다. 신기하게 푸틴과 싸우는 편이 된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누구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나라가 가난해질 것이라 해서 산아제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엄청난 낙태가 이뤄졌습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생존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요즘에 하면 무슨 조선 시대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지금만큼 풍요로울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조선 시대에 지금보다 나라의 믿음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에는 “괜찮다.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코헬렛의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와 재화를 베푸시어 그것으로 먹고 자기 몫을 거두며 제 노고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모든 인간.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정녕 하느님께서 그를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하시니 그는 제 인생의 날수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코헬 5,9.14.16.18-19)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이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도록 일만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몫을 마련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하시며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니, 나는 죽음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쁜 강아지, 고양이를 키우는 애견인, 애묘인이 참 많습니다. 동물을 예뻐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모든 사랑을 동물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그래서일까요? 한때 ‘강아지 번역기’라고 해서, 강아지의 짖는 소리를 통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지금은 시판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대화하고 싶고,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런 상품을 구매했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개나 고양이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닌 그 동물이 되어야 동물의 언어를 할 것이고, 동물의 마음을 알고 자기 마음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사람임을 포기하고 그 동물이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함께 나누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감히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담소를 나누십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죽음으로 완성하면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실 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시대에 인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머물면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속 머물겠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구원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지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듯(창세 15,18 참조), 우리와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계약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기”(필리 3,21)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데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계약을 통해 얻은 은총을 온전하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워 그런 사람이 되어라.

- 핀다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9)

 

간절히 기다리던 봄비가 기도처럼 내린다. 기도는 새로운 변모의 시작이며 모색이다. 기도는 우리 삶의 제일의 가치가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게 한다. 기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한 변모의 핵심이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는 기도는 삶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환하게 열릴 기도가 있기에 우리는 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부터 변화를 시작하신다. 

너가 아니고 내가 먼저 변모의 시작인 것이다. 이와같이 변화는 적극적인 현실의 실천이다. 실천에 의해 우리또한 변화되고 빛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노예에서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도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변모는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변모한다. 거룩한 변모는 기도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기도는 뜨거운 심장의 소리를 다시 듣게하며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다시 만나게 한다.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이다. 사람은 사랑의 인격으로 기도와 함께 변모를 지향한다. 변모의 사순 제2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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