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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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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2022년 3월 15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그들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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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1장 10절, 16-20절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3장 1-12절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잔칫상에서 천상 양식을 받고 비오니 언제나 저희를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더욱 열심히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 집전

 

 

2022년 3월 15일 (화)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

 

마태오 복음 23장은 21-22장에서 소개된 적대자들과 맞선 충돌을 요약하고, 26-27장에서 다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한 비판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이어지는 23장 13-36절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유다교 안에서 합법적 교사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인정하십니다(23,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위선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23,3 참조). 그들은 권력자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짐을 지우고,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다니며 특권을 요구하고 대중 속에서 영예를 찾습니다(23,4-7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23,8-12 참조).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코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자들의 교육을 위한 부정적 본보기로 이용하십니다. 잘못된 행위와 태도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얼마나 더

 

저의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마음 아파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주님께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하신 말씀도 제가 무척 마음 아파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벌이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저는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손가락만으로 일하는 사람이요,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 옆에 있으면 늘 일이 많아 웬만한 사람은 제게 다가오지 않는데 그런데도 제게 다가오는 분들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분들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저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의 문제는 일을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문제 또는 불성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위선의 문제이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처럼 윗자리를 좋아하거나 군림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그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는 모든 짓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인사와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그들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문제는 위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사람들 앞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두 번째 문제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것의 문제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는 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저와 그들이 받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세상의 것들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들이며 그래서 저나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스승의 자리를 가로채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이 하느님께 향하게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그러고는 군림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라고 하신 다음 그런데도 누가 자신을 높이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경고하심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복음에 비춰 저 자신을 성찰하였는데도 개운치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찰을 해도 반성이 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머리의 반성에 그쳐 이 나이가 되었어도 그리고 하느님께 갈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도 여전히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성찰을 해야 반성이 머리에서 마음까지 갈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이웃을 대하는 본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대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결론적으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깔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느님 공경이 위선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도 봉사자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할 때 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더 아래 봉사자에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에게는 사제이기에 모두 잘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기보다는 저를 이용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이 저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을 더 공경하고 높여줄 수 있는 봉사자가 되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저도 제가 신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고 스승이라 불리려는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다 다를 게 없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본성과 윗사람을 대하는 본성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대하는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착각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따르는 본성은 하나입니다. 

동물원의 우리 속의 곰은 매우 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곰을 본인이 키워보려 하다가 뼈만 남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사냥꾼이 자신의 마당에 있는 케이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던 불곰에게 잡아먹힌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사냥 중이던 세르게이는 새끼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신이 키웠습니다. 그 곰은 자신의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작은 곰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야생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곰을 자신이 키워준 덕분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은 성장하면서 세르게이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곰을 보호소로 보내라고 하였지만, 세르게이는 충고를 무시하고 곰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곰을 길들이며 산다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았고 곰의 우리가 열려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와 세 마리의 개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그중 한 마리의 개는 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맛을 본 곰은 또 인간을 노릴 것이기에 경찰들은 흔적을 쫓아 곰을 찾아 사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배은망덕한 불곰의 탓일까요, 아니면 곰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 뜻대로 커 주리라 여긴 주인의 잘못일까요? 본성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전까지, 그러니까 두 발로 걸으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변한 게 아닙니다. 

2003년 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야생에 들어갔다가 곰에게 잡아먹힌 티모시 그레드웰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겁먹으면 나는 아마 죽거나 다칠 겁니다. 이 땅에 있으려면 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날 갈기갈기 찢을 거예요. 그러면 전 죽습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날카로운 야생에서 싸우며 강해질 것이고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승)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 상대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자만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상대를 내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속으면 큰일입니다. 왜 다른 것을 잡아먹는 곰이 자신은 안 잡아먹을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아무리 개가 아기들을 잘 돌봐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개와 아기 둘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개가 고기의 맛을 안다면 다시 늑대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본성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그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어머니가 자녀와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난 언제나 곰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든 나를 키워준 주님을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본성은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그래서 하느님처럼 할 수 있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본성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전에 당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단계에서도 내가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고 또 경쟁하며 살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다 잘 될 것이라 믿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개 우리에서 5년 키워졌지만 20년이 지나도 본인은 개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본인은 개라고 믿으면 사람과 관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야!”라고 보아주고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웃을 대하는 본성이 나의 본성입니다. 

‘꽃보다 누나’ 촬영 때 4년간의 암 투병을 숨기고 활동하던 김자옥 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가자마자 신자도 아닌데 눈물을 철철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성당은 그녀에겐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김자옥 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 기도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 나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그저 돌집처럼 보여도 주님의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느님을 대하는 것처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녀에게 대하는 모습이 남편에게 대하는 모습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고,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주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본성을 알고 싶거든 내가 이웃을 어떤 본성으로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제 방에 공기청정기가 있습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옆에 두고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주위의 공기가 제일 깨끗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공기청정기가 있는 방에서 공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공기청정기 옆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장치이지요. 따라서 오염된 공기가 어디로 모일까요? 공기청정기 옆으로 모이고, 그래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장소가 되기에 공기청정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 재물 때문에 가족이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모으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도 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공기청정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할 수 있는 것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 좋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계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의 행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것, 옷단에 술을 길게 달고 다니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열성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영의 표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건성을 보이고, 사람들의 신뢰심을 얻기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쳐 인도해 주시는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원수를 독살하기를 바라면서 그 독을 내가 마시는 것과 같다.

- 넬슨 만델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 3)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실행이 따뜻한 봄의 문을 활짝 연다.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의 실행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실행하지 않음을 회개하는 사순이다. 바르게 실행할 때 진정 믿음은 믿음다우며 아름답다. 믿고 있는 기쁨은 우리가 실행하는 기쁨으로 드러난다. 구원의 여정은 우리가 진실해지는 겸손의 여정에 있다. 

겸손은 좋은 뜻을 품고 기도에 의지하여 기쁘게 생활하는 것이다. 겸손은 부질없는 자기과시를 경계한다. 교만은 우리의 믿음마저 허물어 버린다. 교만하지만 않으면 어느 때고 길을 다시 찾게된다. 겸손하신 스승 예수님에게서 삶의 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십자가로 더 낮은 곳에서 사랑을 기쁘게 실행하신다. 

삶의 중심은 나무의 뿌리처럼 낮은 곳에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겸손이란 나무의 뿌리 같은 것이며 실행의 원동력이 된다. 겸손과 실행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삶의 축복이 된다. 참된 진리는 참된 실행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 봄날이다. 진실과 힘은 실행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축복이다. 사랑도 실행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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