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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년 11월 24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은 벨사차르 임금의 잔치에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풀이하며, 바빌론 왕국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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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다니 5장 1-6절, 13-14절, 16-17절, 23-28절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1
벨사차르 임금이 천 명에 이르는 자기 대신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이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2
술기운이 퍼지자 벨사차르는 자기 아버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라고 분부하였다.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시려는 것이었다.
3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 곧 하느님의 집에서 가져온 금 기물들을 내오자,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4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금과 은,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하였다.
5
그런데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촛대 앞 왕궁 석고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임금은 글자를 쓰는 손을 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임금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허리의 뼈마디들이 풀리고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13
다니엘이 임금 앞으로 불려 왔다. 임금이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나의 부왕께서 유다에서 데려온 유배자들 가운데 하나인 다니엘인가?
14
나는 그대가 신들의 영을 지녔을뿐더러, 형안과 통찰력과 빼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다는 말을 들었다.
16
또 나는 그대가 뜻풀이를 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대가 저 글자를 읽고 그 뜻을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대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고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
17
그러자 다니엘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그래도 저는 저 글자를 임금님께 읽어 드리고 그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임금님께서는
23
하늘의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던 기물들을 임금님 앞으로 가져오게 하시어,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손을 보내셔서 저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25 그렇게 쓰인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26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27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28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화답송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하늘의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비와 이슬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모든 바람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추위와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복음
루카 21장 12-19절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나의 빵을 함께 나누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마음이 되고 끝까지 인내하여 영원한 상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4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4일 (수)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사랑을 위한 인내
몇 년 전 피정 때 산책을 하면서 선배 신부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신부는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하고 제가 말하였더니, 선배 신부님이 “어쩌면 너도 나를 참아 주며 살았겠지만, 나도 너를 견디며 살았다! 니만 견딘 것이 아니여!”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참고 인내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상대가 나를 더 많이 참아 주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인내합니다.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 앞에서 비굴하게 견뎌 내고, 곁에 있는 가족들은 늘 마주하여야 하기에 또 서로를 견뎌 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무 일 없는 듯 견뎌 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상대를 견뎌 내기도 합니다.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참기도 하고, 나보다 내가 바라보는 이가 더 행복해지게 하려고 인내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하고 참고 견뎌 내는 이유’입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인내는 자신을 위한 인내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있지만, 사랑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성모님께서 그러셨으며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아프지 않아서 두렵지 않아서 고통을 참아 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더 크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내의 이유가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이 참아 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행복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내로써 얻을 것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고, 심지어 가족들에 의해 넘겨져 죽임을 당하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살다가 곱게 죽을 생각은 하덜 말라는 말씀이고, 오히려 그렇게 될 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의 인생은 편하게 살다가 곱게 죽을 팔자가 아닙니다. 그뿐이 아니라 박해자들 앞에 서서 증거까지 해야 하고, 박해자 앞에 서는 것을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마침 베트남 순교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그런데 베트남 순교자들은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순교를 당했고 삼십만 명 이상이 순교를 당했으며, 그래서 우리처럼 한꺼번에 많은 분이 성인 품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순히 순교를 당한 것이 아니라 배교의 표시로 십자가를 발로 밟으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박해란 본래 순교와 배교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지만 십자가를 밟으라는 것은 그저 순교하는 것 이상의 모독과 증거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저 배교하는 것과 십자가 밟고 배교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저 배교하는 것은 자기 신앙만 포기하거나 겉으로만 배교하는 척 할 수도 있지만 십자가를 발로 밟고 배교하는 것은 단순한 자기 신앙 포기 이상의 하느님 모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독을 하든지 모독하기 싫으면 적극적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는 모독도 하지 않지만 증거도 하지 않는 우리의 어정쩡한 신앙을 돌아보게 하고 부끄럽게 하지요.
사실 우리의 많은 신앙이 내 마음의 평안이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이웃의 구원과 하느님을 적극적으로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신앙이 뜨겁지 않음은 물로 마음 평안에 도움 되지 않으면 별 마음의 가책이 없이 신앙도 포기합니다.
신앙과 사랑은 고통만큼 뜨거워지고, 박해와 고통을 선택하면 더 뜨거워지는 법이지요. 박해와 고통을 선택한 신앙과 사랑이 더 뜨겁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사랑은 왜 뜨겁지 않을까 안타깝고 그래서 나의 사랑이 뜨겁기를 바란다면 우선 고통을 선택해야 하고, 그런 다음 이렇게 감수한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시는데 인내로써 얻을 것은 생명만이 아니고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뜨겁기를 바란다면 감수한 고통 그러니까 기꺼이 선택한 고통을 인내롭게 감당해야 함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과 가까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오시는 이유 : 명의는 작은 병에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복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죽음을 현재화하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기 때문에 조금 더 생존하기 위해 세상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현재화하여(Memento mori) 살다 보면 당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가지면 하느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좋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시면 내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김용태 신부님의 서품 준비 피정 중에 있었던 체험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이전에 항상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용태 신부가 사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자신의 마음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테러범들이 등장하였고 지독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으며 배교하지 않으면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순교 직전에 매번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부제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김 부제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과 서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젠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밤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시 같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이 온통 채워지는 느낌이었고 주님께서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체험한 후에 순교를 받아들일 힘이 생겼습니다. 이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만약 김용태 신부가 며칠 동안 계속 죽음을 현재화하는 두려운 상황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사제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죽음의 현재화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당신을 증언하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1년 전 남편을 뇌종양으로 여읜 아내와 20살 먹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암이 찾아왔고 1년 10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연년생 고3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을 둔 맏딸 카타리나는 외국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병환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일단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로 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어찌하다 보니 개신교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동생과 자신, 단둘만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학교이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카타리나는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약간 그런 기도회를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이라도 하며 기도를 해보려 했습니다. 당시에 맏딸이라는 부담과 아버지가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이럴 바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미술과 같은 특기가 있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삶이 조금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김용태 신부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성령께서 쑥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과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 귀에 대고 계속 기도를 해 주셨고 그 기도 말이 꼭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강한 적도 없다면 하느님은 그 강한 적을 이기게 하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점점 식어만 갔습니다. 무언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죽음 이후를 극복할 힘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바치려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기도가 안 되어 그냥 눈을 뜨려는데 환시와 같은 것을 봅니다. 빛과 같으시고 엄청나게 크셔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고 그 앞에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행복한 모습의 아버지셨습니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맏딸로서의 부담,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죄책감, 또 외국에서 생활하다 우리나라 들어와서 느껴야 하는 청년으로서의 막막함 등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자신이 그렇게 운 이유를 말하며 엄마까지 위로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싱가포르로 대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도 성당에서 봉사 열심히 하던 형제가 갑자기 봉사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가 아이 꿈에 나타나서 천국 앞까지 같이 걸어갔던 이야기를 오히려 해 주어서 어머니가 놀랐다는 이야기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은 성령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이에게 오십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의가 굳이 약국에서 사 먹어도 낫는 병을 고치겠다고 그 집에 방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현재화하고 그 고칠 수 없는 병을 극복하려 한다면 주님은 분명 성령을 주시어 이 세상에서 끈기 있게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현재화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1940년 9월 7일. 348대의 독일 폭격기가 영국 해협을 횡단해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9개월에 걸쳐 런던 지역만 8만 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 100만 채의 건물이 파손, 파괴되었으며, 영국인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몇 개월에 걸친 폭격으로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 이상을 일으키리라 생각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분명히 컸습니다. 그러나 정신병동은 텅 비었고, 오히려 이 기간에 정신건강이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줄었고, 자살하는 사람도 평상시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전쟁 후에 이 대공습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서로 도왔고, 정치적 입장도 또 빈부의 격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인간은 자기 본성의 모습을 찾는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의견에 공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본성은 분명 주님의 속성인 ‘사랑’에 맞춰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수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 때가 바로 자기 본성을 찾아 나서는 소중한 시간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시련과 어려움으로 상징되는 박해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박해는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든 시간, 가장 무서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 박해에 어쩔 수 없다면서 배교를 해야 할까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내 목숨이 살고 봐야지 라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할까요?
지금은 그런 박해가 없어서 이에 따른 피의 순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박해는 계속해서 찾아옵니다. 즉,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배교이며,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배교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도 있어.’라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마음 역시 배교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런 배교의 유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배교를 하게끔 유혹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모든 유혹을 이겨내는 인내입니다. 이 인내로서 생명을 얻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긍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것보다 모든 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
- 지그 지글러
마음의 여유
동물 중에서 장수하는 동물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유순하고 한가로움을 즐긴다고 하더군요. 특히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이를 보십시오. 거북이는 초조함을 전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맹수는 어떨까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를 잘 내고 성급한 사람은 대체로 단명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독일의 한 탄광이 무너져서 광부들이 갱내에 갇혔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상태에서 1주일 만에 겨우 구조되었는데, 사망자가 딱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사망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시계를 통해 얻게 된 불안과 초조였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어떤 분은 이 세상 안에 미련이 없다면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18)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순교는 사랑을 가득 품고있다. 때를 놓친 사랑은 언제나 아픔이었다. 인내를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인내가 사랑이다.
신앙인은 인내의 열매를 먹고 산다. 신앙인의 현주소는 인내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인내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 앞에 머리를 숙인다. 십자가 없는 만남이란 없었다.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준다. 십자가의 빛이 만남의 빛이 된다. 십자가의 승리로 요약되는 순교자들의 삶이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내어드려야 할 사랑의 기쁨이다.
십자가가 사랑의 기쁨이 된다.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인의 삶에서 십자가의 때를 배운다.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열매는 없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삶이란 사랑을 일깨워주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와 함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십자가가 참 스승이다. 십자가에서는 잃을 것이 더 많을 것 같아도 실은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을 얻는 것이다.
하나도 잃지 않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 그 신비이다. 오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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