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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26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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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

 

 

2021년 11월 26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은 밤의 환시 속에서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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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다니 7장 2ㄴ-14절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나 다니엘이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첫 번째 것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것은 날개가 뽑히더니 땅에서 들어 올려져 사람처럼 두 발로 일으켜 세워진 다음, 그것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 


그리고 다른 두 번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다. 한쪽으로만 일으켜져 있던 이 짐승은 입속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 고기를 많이 먹어라.” 


그 뒤에 내가 다시 보니 표범처럼 생긴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 짐승은 등에 새의 날개가 네 개 달려 있고 머리도 네 개였는데, 그것에게 통치권이 주어졌다. 


그 뒤에 내가 계속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이 나왔다. 커다란 쇠 이빨을 가진 그 짐승은 먹이를 먹고 으스러뜨리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그것은 또 앞의 모든 짐승과 다르게 생겼으며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자그마한 뿔이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나온 뿔 가운데에서 세 개가 그것 앞에서 뽑혀 나갔다. 그 자그마한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1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12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산과 언덕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땅에서 싹트는 풀과 나무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샘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바다와 강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용들과 물에 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하늘의 모든 새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온갖 짐승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1장 29-33절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6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6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유학 시절 독일에 도착하여 지도 교수님을 찾아뵙고 처음으로 논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들려주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성경 속의 신학과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오늘이 반영되지 않으면 죽어 계신 하느님, 성경이 쓰인 시대의 하느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하느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오늘을 바라보려 노력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고 있는 삶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시대가 직면하여 있는 상황 속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활동하시고 찾아오신다는 진리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고려해라.’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삶에 대한 충실함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 흐름을 쫓는 것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살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갇혀 여유롭지 못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지나온 길에 무엇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위로를 얻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 ‘바라봄’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그 공동체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라는 관계 ……. 이처럼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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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마지막 시대에 해답은 유대인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갑작스럽기 오지 않고 ‘순차적’으로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전체적으로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오겠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봄이 왔고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도 눈만 감고 있지 않으면 다 알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가장 확실한 표는 이스라엘의 재건입니다. 2천 년 이상 나라가 없이 떠돌다가 다시 나라가 재건되는 경우는 역사에 없습니다. 인원이 많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1300만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3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1948년 독립국으로 되었고 전쟁을 통하여 이전 땅을 회복했습니다. 10억이 넘는 주위 아랍 나라들도 전쟁하면 천만 명의 이스라엘에 집니다. 

성경에 예언된 순차적인 진행은 이렇습니다. 일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나중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스라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루카 21,24)

이는 예수님만 그렇게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 25-26)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척할 이스라엘을 정화하기 위해 2천 년의 시간을 이용하신 다음, 그 정화가 끝난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이제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은 덜 고통을 당할 것은 뻔합니다. 우리도 지혜가 있다면 이스라엘과 닮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어쨌건 유대인이 답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과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하늘에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토론주제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먼저 모세가 십계명을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법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당신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사랑이 전부죠.”

셋째는 프로이트가 자신이 쓴 『꿈의 해석』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무의식과 섹스가 전부에요.”

마르크스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놓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밥이 전부죠. 돈이 전부에요. 이게 세상을 움직인다고요.”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칠판에 ‘E=MC²’이라 휘갈겨 쓴 다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이 모든 등장인물이 다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유대인식 조크입니다. 

유대인들에 세상에서 보여주는 역량에 대해 말하자면 입만 아플 뿐입니다. 발명가 에디슨, 20세기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전설의 앵커 래리 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컴퓨터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스타벅스의 하월드 슐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재들이 유대인일 뿐 아니라, 재산 10억 달러 이상인 미국인 가운데 1/3이 유대인이고 미국 유명 대학 교수 중 1/5이 유대인이며,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0.2%가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연구 결과 유대인의 평균 IQ는 95이고 한국인은 106입니다. 그들이 이런 성과를 올리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말하라면 ‘자존감’입니다. 피카소도 유태인인데 유태인은 어머니만 유태인이면 유태인이 됩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존감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다고 믿으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 

이런 자존감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종교교육’에서 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에게 자존감을 주려고 하더라도 ‘넌 내 자식이야!’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신 “넌 하느님 백성이야!”라는 자존감을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 해냅니다. 그들은 바다를 가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하는 것은 자녀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성전에 봉헌되셨고 예수님도 봉헌되셨습니다. 12살 성인식 때는 아들이 사라져도 부모는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이미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12살 때 대학 등록금 정도를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리고 믿어줍니다. 

자존감은 깎아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고 시키면 아이들은 ‘아, 나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자존감 바닥의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의 머리에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박혀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이 멋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자녀를 많이 낳습니다. 이것도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럽이 출산율이 높아 봐야 이스라엘의 절반입니다. 우리나라에 세계 꼴찌입니다. 아이를 키울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결국 잘 지키고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이때 성경에 예언된 대로 믿으면 마지막 때에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종교교육을 통한 자존감 높이는 가정교육을 본받아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하겠습니까? 집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교육비도 오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도 사는 것이 힘든 것은 똑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님을 죽은 민족이기는 하나 결국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연구하고 본받아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벌로 받았던 고통에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

 

책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적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스스로 노력해 자신을 돕는다.

2) 도움받을 만한 가치를 보인다.

3)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린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번째인 자신의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어느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깥의 일이었는데, 특히 쓰레기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레를 이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끌고 가는데, 친구 2명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제가 끌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친구 2명이 다른 일을 하러 갔고, 저 혼자 수레를 끌어야 했습니다. 수레는 너무 무거웠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혼자가 끌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만 있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는데,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도와줄까요?”라면서 수레에 붙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도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겁다고 또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사람들의 반응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력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삶이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화나무의 비유 말씀을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잎이 돋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힘들다고 불평불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께서 제일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때, 다른 이들도 함께할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양쪽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비스코트

 

 

하느님 눈에 띌 수 있는 지혜

 

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눈을 팔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제 엄마가 없어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좋아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을까요? 
 
이 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 두려워졌고 그래서 “김서연”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엄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사람도 많이 있는데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되겠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엄마를 부르면 다 나를 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만 나를 보라고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 
 
아이의 지혜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문득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21,32)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마지막에는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의 말씀만이 남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살다가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를 묻게된다.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께로 가게된다. 

나무또한 마지막처럼 햇볕을 향하여 가지를 뻗어나간다. 햇볕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언제나 사람의 표징은 사람이다. 사람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 사람과 함께 걸어가는 표징이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내어주시는 진정한 사랑이 표징으로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따라가는 우리들 삶의 여정이다.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하느님 나라의 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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