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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27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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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

 

 

2021년 11월 27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에서 본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설명을 듣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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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다니 7장 15-27절

 

통치권과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15 
나 다니엘은 정신이 산란해졌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환시들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16 
그래서 나는 그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다가가서, 이 모든 일에 관한 진실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그 뜻을 나에게 알려 주겠다고 말하였다. 

17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다. 

1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다.” 

19 
나는 다른 모든 짐승과 달리 몹시 끔찍하게 생겼고, 쇠 이빨과 청동 발톱을 가졌으며, 먹이를 먹고 으스러뜨리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는 네 번째 짐승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었다. 

20 
그리고 그 짐승의 머리에 있던 열 개의 뿔과 나중에 올라온 또 다른 뿔에 관한 진실도 알고 싶었다. 그 다른 뿔 앞에서 뿔 세 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다른 뿔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으며, 다른 것들보다 더 커 보였다. 

21 
내가 보니 그 뿔은 거룩한 백성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22 
마침내 연로하신 분께서 오셨다. 그리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권리가 되돌려졌다. 이 거룩한 백성이 나라를 차지할 때가 된 것이다. 

23 
그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번째 짐승은 이 세상에 생겨날 네 번째 나라이다. 그 어느 나라와도 다른 이 나라는 온 세상을 집어삼키고 짓밟으며 으스러뜨리리라. 

24 
뿔 열 개는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임금이다. 그들 다음으로 또 다른 임금이 일어날 터인데 앞의 임금들과 다른 이 임금은 그 가운데에서 세 임금을 쓰러뜨리리라. 

25 
그는 가장 높으신 분을 거슬러 떠들어 대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을 괴롭히며 축제일과 법마저 바꾸려고 하리라. 그들은 일 년, 이 년, 반년 동안 그의 손에 넘겨지리라. 

26 
그러나 법정이 열리고 그는 통치권을 빼앗겨 완전히 패망하고 멸망하리라. 

27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이스라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주님의 사제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의인들의 마음과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거룩한 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1장 34-36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7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7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맡겨 드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열정을 키우는 일

 

강의를 시작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서면 처음에는 언제나 긴장이 됩니다. 강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처음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긴장감과 떨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그런데 긴장감 없이 어떤 일을 하다 보면 꼭 실수를 연발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작은 실수 때문에 그 일을 완전히 망쳐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긴장감은 어쩌면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하였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더 많이 준비하였기에, 세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기에,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도 평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탕과 만취, 일상의 근심도 날마다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되면 실수하는 것 또한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 습관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그 상처와 아픔조차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의 실수에도 고민하고 반성한다면, 긴장하며 일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그 긴장감은 나의 약함을 바라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고 반성을 하며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결과를 돌아보면 언제나 부족함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를 할 때,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라고 시작합니다. 맡겨 드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열정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랑의 불, 일에 대한 열정, 그 열정을 통하여 실수가 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가치를 전하는 당신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깨어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긴장감을 오늘도 즐기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오늘은 연중 34주 토요일 그러니까 연중 시기 마지막 날이고, 내일 시작되는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 곧 종말에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가 온다는 것, 곧 종말과 주님이 같이 온다는 것을 계속해서 얘기하고, 그래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으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애기하지요. 

그런데 종말과 주님이 같이 오면 우리는 무엇을 맞이해야 할까요? 이렇게 정식으로 물을 때 올바른 정신의 우리라면 당연히 종말이 아니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우리는 그리고 현실의 우리는 현실에 몰두하거나 취하여 정신을 못 차리게 되고, 그래서 종말도 주님도 까맣게 잊고 지내기 일수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먹느라 정신이 없고 노느라 정신이 없으며 돈 버느라 정신이 없고 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마음이 물러지는 것과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방탕은 꼭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만이 아니고, 만취는 꼭 술에 대취하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방탕하고 그 정도로 대취하지 않지요. 

만취하지 않아도 소주 한 잔에 취할 수 있고, 술에 취하지 않아도 잠에 취하거나 기분에 취할 수 있으며, 돈을 흥청망청 쓰기보다는 돈 버는 데 오히려 여념이 없는 거지요. 

이것이 소시민적인 방탕과 만취와 근심이고, 보통 사람들의 방탕과 만취와 근심입니다. 

그러나 방탕과 만취와 근심이 비록 소시민적일지라도 마음이 물러지게 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술이나 마약에 취하지 않고 잠에 취해도 신랑을 마중나가지 못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두 가지를 알아야겠습니다. 곧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육의 정신은 버리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은 차려야겠습니다. 

기도와 헌신의 정신,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케 하는 힘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든 기도하십시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역사가이며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은 집에만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집필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작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대작의 첫 작품은 불에 타 없어졌고, 두 번째로 쓴 작품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천 장의 원고를 완성한 뒤, 친구인 존 스튜어트 밀에게 감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그의 하녀가 책상 정리를 하다가 쓰레기인 줄 알고 난로에 넣고 태워버린 것입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작업을 하기에, 어떻게든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펜으로 일일이 써야 하는 시대였으니 원고가 없어지면 그 모두가 헛일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토머스 칼라일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냥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서 건물을 만드는 것처럼 다시 쓰게 됩니다. 그리고 1837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작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일은 포기하게 만드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지니는 방법이 바로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만남과 대화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기도는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기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고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이런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만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는 분들, 또 할 줄 모른다고 하는 분들에게 “어떻게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 엘리잘 벤 주다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쫓아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 9명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이 감기로 무척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건강한 사람 9명과 감기 환자 1명이 같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건강한 사람의 에너지로 아픈 사람을 낫게 해줄 것 같기도 하지만 전염병은 이런 예측대로 가지 않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한다면 모두 감기 환자가 될 확률은 아주 높아집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감기 걸리는 사람을 건강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우리 삶도 비슷합니다. 부정적 말과 행동 하나로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안에도 이런 말과 행동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따라서 부정적인 영향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격리하고 쫓아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방탕과 만취의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지 않아야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 빠르게 지나가고 빠르게 저무는 우리 일상의 모든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했다. 일상의 근심으로 몰아넣는 우리들 방탕과 만취의 시간들을 눈물 떨구며 반성한다. 

방탕과 만취로 오시는 주님도 모른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자신이다. 건강한 일상을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무질서한 우리들이었다. 무질서는 소중한 관계를 뒤엎는 가장 큰 재앙이다. 주님께서는 깨어나는 방법이 당신을 향한 기도임을 가르쳐주신다. 

기도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용서이다. 주님과 가까워지지 않고서는 일상의 모순을 멈출 수 없다. 건강한 일상을 되찾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일상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일상과 기도 사이에 가장 좋은 사랑이 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의 부족했던 시간과 모든 기쁨을 주님께 봉헌한다. 그 모든 순간에 가장 좋으신 주님이 계셨다.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은 없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랑을 다시 일깨워주신 주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든 여정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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