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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1주간 월요일 -
2021년 11월 29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한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많은 사람이 모여와 하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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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 2장 1-5절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신다.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화답송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나의 형제와 벗들을 위하여 비노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리라.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복음
마태 8장 5-11절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9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9일 (월)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기다림의 시간이 모두 같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풍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의 기다림과 시험 전날 잠을 못 자며 공부하는 아이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과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하고 기대되는지의 여부는 누구를, 무엇을, 그리고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인대장의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아픈 종을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배려합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마침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을 만난 백인대장은 이를 표현합니다.
“주님, 제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욕심과 바람만을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표현합니다.
“수고롭게 이방인인 저의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시면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기다림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기쁨과 행복의 기다림인가요? 아니면 고통과 초조함의 기다림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기에 너무 익숙해진, 그래서 아무 느낌 없는 기다림인가요? 우리는 가난한 구유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의 활기 속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기다림인지 잘 바라보아야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가난하게 오신,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산 등산가
오늘 복음은 백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치유받은 종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아시다시피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백부장이고,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사랑 등등이겠지요.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왜 이 얘기를 대림절 첫날 듣게 되는지, 우리 교회는 왜 백부장 얘기를 대림절 첫날 복음으로 선택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랬을 때 백부장이 대림절을 잘 지내는 우리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대림절에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자캐오가 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마을에 오신 주님을 보고 싶어서 나무에 오르는 열망도 보이고 그래서 자기 집에 주님을 모셔들이기까지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백부장이 더 좋은 본보기인 이유는 자기 집에 가시겠다는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얘기할 정도로 자캐오보다 더 큰 믿음과 겸손을 보인 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방인으로서 주님을 찾아와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 내내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전해주는 이사야서는 오늘 그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렇게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실 메시아를 만나러 가자고 오늘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하지요.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주님의 산으로 오르고, 주님의 집으로 달려간 모든 민족과 백성의 대표이고 본보기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산 등산가이고 우리도 주님의 산 등산가여야 합니다. 이때 떠오르는 유명한 시편이 있지요.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주님께 듭시려 하노니. 야곱의 하느님이!"
그래서 저는 어제 그제에 이어 오늘도 정신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대림절에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가 되자고. 주님께서 드시도록 문을 여는 이가 되자고.
그래서 다른 산을 오르지 않고 주님의 산을 오르고,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문을 열자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에 대해 묵상한다고 다 믿음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중풍에 걸린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는 굳이 오시지 않아도 한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그들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면 분명 그분의 종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묵상으로 얻어진 믿음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 주님께 참믿음으로 살고 왔다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위해 하느님의 대리자라 여기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청할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백인대장처럼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우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도 묵상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선 우리 묵상이 ‘주님은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를 확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심을 믿어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걸음을 받쳐줄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어떤’ 성품을 더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묵상한다고 믿음이 다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이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괴물이 나타나서 그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정진수라는 인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죄에서 벗어날 것을 설파합니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까지 생겨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집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형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의 딸이 새진리회의 추종자입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이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10년밖에 살지 않고 출소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옥을 만드신 분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한다는 새진리회의 교리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정진수란 인물도 사실 고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나는 무슨 죄를 지었나?’를 되새기며 그 고지가 틀렸기만을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포가 자신을 죄짓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사의 딸과 함께 범죄를 저지릅니다. 죗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온 형사의 딸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함께 납치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사자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 사람을 불태웁니다. 어차피 지옥의 사자가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자신들이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점점 더 세상은 지옥이 되어갑니다. 이것을 통해 돈을 버는 새진리회, 그리고 자신이 고지받은 것을 알면 가족이 다칠까 봐 몰래 죽으려고 외딴곳으로 숨는 사람들, 또 그런 신의 계시를 방해하는 이들을 또 방해하는 세력들. 이렇게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되어간다는 내용이 지옥입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만 집중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자비보다 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무서운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정의로우신 분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것들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같이 유다인이 아니어도 좋은 것을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자기 종의 병이 낫게 하실 분임임을 알았습니다. 믿음은 자비가 곧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전능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반도의 유일한 1946년생 근육할아버지’란 제목의 비디오가 있습니다. 70이 다 되어가시는 근육 할아버지의 근육은 젊은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완벽합니다. 그만큼 큰 노력을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50년간 소싸움을 하는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지고 나면 그 패배감을 술과 담배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다 건강 악화로 위, 장, 쓸개, 맹장 수술을 해야 했고 아내는 할아버지의 병수발과 함께 생계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크게 깨달은 할아버지는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에 자신도 땀 흘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할아버지의 근육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묵상하고 정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이 두 부부는 서로서로 상대의 고생을 묵상한 것입니다. 상대의 자비와 사랑을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상대에게 서운하지 않은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가 긍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생기게도 하고 사라지게도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도 우리는 자비를 묵상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상황이지 그것만을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밝은 면, 자비와 사랑을 묵상할 때만 커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차피 내가 믿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고 믿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감소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면 항상 하느님의 긍정적인 속성을 묵상하여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카인과 아벨 이야기
갈등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이를 폭력으로 또 힘으로 없애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폭력, 힘으로 인한 갈등 해소는 결국 모두에게 아픔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 부서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각 부서는 상대 부서를 힘으로 눌러 자기 부서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한 부서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한 승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힘겨루기를 계속하면서 다음번에는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카인이 아벨을 죽여서 승리자가 된 것 같지만, 결국 둘 다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벨은 목숨을 잃었고, 카인은 자존감과 평화를 잃었습니다.
이렇게 힘에 의한 갈등 해소는 더 큰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 갈등 해소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갈등 해소는 사랑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교도이면서 로마인의 장교로 알려져 있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종이 아픈 상황의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인 행동은 아주 의외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찾아가 부탁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족이 아닌 거느리고 있는 많은 종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종을 위해 직접 찾아가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그가 종을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을 낮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의 구조를 자신의 지위를 통해 나타나는 힘이 아닌, 종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직접 갈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 구조에서 보여 준 백인대장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커 보이는 폭력과 힘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기본으로 있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 도저히 풀기 힘든 갈등도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백인대장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갈등을 깨끗하게 해소하면서, 평화 속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작하는 방법은 그만 말하고 이제 행동하는 것이다.
- 월트 디즈니
가시 뽑기
어떤 꼬마 아이가 놀다가 자그마한 나무 가시가 발뒤꿈치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따가웠고, 그래서 까치발을 하고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서 가시를 뽑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엄마는 핀셋을 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핀셋이 커다란 주사처럼 보였고, 뽑을 때의 통증이 너무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네가 원한다면 가시를 그냥 둘테니 뽑을 준비가 되면 다시 오렴.”이라고 말했습니다.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통증으로 뛸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엄마에게 가서 핀셋으로 가시를 뽑았습니다.
가시를 뽑는 순간의 통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신나게 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도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과의 갈등, 사랑을 실천하기 힘든 마음, 부정적 생가 등의 가시 말이지요. 이를 어떻게 하십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까요? 뽑을 때의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지금 당장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곧바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마태 8,8)
마음이 무너진 곳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시고 누구보다도 먼저 기도하여 주시는 도움의 주님이 계신다. 삶의 아픔과 괴로움을 고쳐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은총의 대림시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주위의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다. 기도가 멈추면 사랑도 멈춘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 믿음이다. 믿음은 진실한 한 마디 말씀에서 치유되지 않던 관계의 아픔까지 낫게 되는 은총이다.
믿음의 문을 열게하시는 말씀이다. 그저 말씀다운 한 말씀이 필요한 말씀의 여정이다. 참된 믿음은 말씀으로 서로를 살린다. 말씀 안에 희망이 있고 감동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말씀이 사람이며 사람이 말씀이다. 믿음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이 빠져버린 믿음은 힘을 잃는다. 말씀의 나눔이 희망의 도착이 된다. 말씀과 마음이 만나니 감탄이 된다. 한 마디 말씀이 필요한 여기에 우리가 있다.
오늘을 구원하는 말씀의 실천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믿음의 신비이다. 지나칠 수 없기에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는 말씀의 대림이다. 마음과 몸에 필요한 말씀이 우리를 다시 오늘을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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