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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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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1주간 수요일 -

 

 

2021년 12월 1일 (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광야에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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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25장 6-10ㄱ절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5장 29-37절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1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왜 두 번이나 연달아 들려줄까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두 번이나 연달아 들려줍니다. 왜 비슷한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들려줄까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4,13-21)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오천 명 그리고 열두 광주리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등장하는 빵 일곱 개와 일곱 바구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가나안 땅 이방의 일곱 민족을(신명 7,1 참조)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차, 이 기적이 완전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천 명은 사방에서 몰려온 많은 이(천 명)를 상징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주 대상으로 기적을 베푸셨음을 보여 줍니다. 두 번의 빵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심을 나타냅니다.

이 기적들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쓰인 낱말의 어원은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내장이 끊어지고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고통으로 느끼는 공감의 마음이자 사랑의 마음과(로마 8,35.37-39 참조)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기꺼이 내어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내어놓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군중에게 나누어 줍니다.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말 가운데 ‘천민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있습니다. 천민자본주의는 돈만을 중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사회를 퇴보시킬 뿐 아니라, 사람마저도 돈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소비함으로써 채우라고, 그렇게 해서 자신을 확인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드높여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산 위에서 굶주린 다음

 

어쩌자시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어찌 산 위에 자리를 잡으시는지? 그것도 평지로 가셨다가 굳이 산 위로 오르시는 것은? 다리저는 이와 눈먼 이들이 이곳을 어찌 오르라는 것인지?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마태 15,30)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이 홀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이 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니 어떻게 갔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네요. 

더욱이 주님께서 이들이 있는 평지로 가셨다가 산에 오르신 것이니 그들을 모아 산 위로 데리고 가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네요. 

그렇지만 어쨌거나 평지에서 만나 주셔도 되는데 왜 오르기 힘들게 굳이 산 위에 자리를 잡으시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니 알아봐야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가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러신 거네요. 

그러니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으니 우리는 그런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이 대림절에 평지에서 산으로 오르는 열성을 보이라는 얘기입니다. 

고통을 통과한 은총이 더욱 빛납니다. 아니,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은총인 줄도 모릅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으면 음식이 맛없으며, 매일이 잔치면 갈망이 없고 갈망이 없으면 잔치를 차려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사흘이나 굶긴 뒤 먹이신 뜻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이렇게 해서 치유를 받은 사람이 주님의 사랑까지 받습니다. 그래서 치유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받고, 감사로 그칠 사람들의 입이 하느님 찬미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 대림절에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산 위로 오르신 뜻을.
사흘이나 굶주리게 하신 뜻을. 

대림절은 갈증과 갈망의 시기입니다. 대림 시기가 산 위에서의 사흘인 셈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도전을 멈출 때 사랑도 멈춘다.

 

오늘 복음은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이 이뤄진 곳은 갈릴레아 부근 산입니다. 산이기는 하지만 ‘광야’로 표현된 것을 보니 척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집에 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갈릴레아 부근이라면 사실 조금만 가면 동네가 나오는 곳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이리 광야에서 머물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심지어 배고픔까지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본인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주님과 오래 머물 수 있고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해 주시는 기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축복을 얻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기적 바로 위에 예수님께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무작정 병자들을 데려왔고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산으로, 광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어쩌면 엄청난 모험입니다. 도전입니다. 이들이 안식의 빵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마태오는 바로 이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그 먼 곳까지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영화 ‘코다’(2021)는 루비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루비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부모님과 오빠의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바로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었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서 인부를 쓸 수 없었고 루비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무전을 받을 한 사람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생선 냄새가 난다고 왕따를 시킵니다. 하지만 루비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따라 합창부에 들어가려 합니다. 합창부 선생님은 매우 엄격하신 분이고 친구들이 쳐다봐서 루비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음악부에서 노래합니다. 

루비의 음악 실력을 알아본 선생님은 자신의 모교인 버클리 음대에 도전해보자고 합니다. 대학 갈 돈이 없다고 말하니 장학금을 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비는 집안일과 음악수업을 병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혼나고 저기서도 혼이 납니다. 하루는 배에 함께 타지 못했는데 해경에게 잡혀 어업을 못 할 지경까지 갑니다. 이에 부모님은 루비 탓을 합니다.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루비도 마지막 음악 발표회만 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루비가 행복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본 부모님들은 마음을 바꿉니다. 자신들이 집은 어떻게 꾸려가겠다고 하고 루비 모르게 버클리 음대 입학원서를 낸 것입니다. 실기 시험이 있는 날 가족들도 함께 학교로 갑니다. 그러나 루비는 혼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선생님도 올라와서 루비를 도와줍니다. 가족들은 위층으로 몰래 올라와서 루비를 응원합니다. 루비는 수화로 가족들에게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러자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 가족에게 말하듯이 할 때 억눌렸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루비는 유일하게 가족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합격하고 가족은 루비를 떠나보내며 행복의 포옹을 합니다. 

루비에게 가족은 짐이 되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루비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가족을 떠나도 가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도전해야 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힘입어 산다는 말은 하느님 없이는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어떤 능력을 발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할 때 안 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엄청난 능력이 발휘됨을 느낀다면 그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빵 일곱 개를 먹고 일곱 바구니, 곧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도전해서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실패하면 현명해진다고 합니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과 오래 머물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함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도전해서 성공해야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로라 윌킨스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그녀는 중국인이 휩쓸던 다이빙 종목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했고 7주간 병원에 입원하며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이 말은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면 그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안식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을 고쳐달라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서 주님께 대한 찬양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힘으로 매일 도전합시다. 아기는 걷기를 도전하면서 부모를 더 사랑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더 사랑하게 됩니다. 도전 없이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증가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봉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독서의 중요성을 거의 모든 사람이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담긴 책을 출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책이든 저자의 엄청난 내공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공이 담겨있는 책을 읽고 따르면서 자신의 내공도 높일 수 있기에 독서는 정말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집 센 사람입니다. 고집이 너무 세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기에 책을 읽어도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 발전도 있고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같은 내용만 읽으면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저 역시 다양한 책을 읽으려 합니다. 다양한 책을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은총이 얼마나 컸는지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을 보면(창세 40,13; 여호 1,11 참조) 하느님의 도움은 사흘 후에 내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즉,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하느님의 도움이 드러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있었던 군중이 가다가 지쳐버릴지 모른다는 현실 생활을 지적하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남자만도 사천 명(마태 15,32 참조)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전에 빵 5개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4천 명이면 빵 3~4개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있는 것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을 먹이신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할 것이 3~4개의 빵만 있었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배불리 먹이실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봉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헌의 마음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는’(이사 25,8 참조)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이기에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 키케로

 

 

죽음

 

죽지 않는 약을 찾아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던 중국의 진시황제는 생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따라서 몸에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챙겨 먹었을까요? 실제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을 동쪽 나라로 파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나이 쉰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사인은 오래 살기 위해 장기간 복용했던 단약 때문이었습니다. 이 단약에는 수은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이른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지 않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는 삶이 행복할까요? 어느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죽지 않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의 날이라며 너무 좋아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축복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일 30만 명이 사망했는데, 죽는 사람이 없어 인구증가가 계속 이루어졌고, 식량부족으로 이어져 4개월 뒤에는 사회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죽음이 없어야 할까요? 죽음은 살아있는 이에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살아있는 이에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이로써 또 다른 세계인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은 절대로 부정의 단어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5,37)

 

우리의 울음과 배고픔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신다. 지친 우리 삶을 끝까지 껴안아 주신다. 삶의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소외된 변방이란 없다. 

가려져 있던 하느님 사랑이 드디어 가난과 결핍으로 얼룩진 삶을 위로하듯 사랑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사랑의 빛은 생활의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모두를 배불리 먹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삶의 아픔을 고쳐주시고 우리 삶의 허기를 채워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매일같이 주님의 밥상에서 힘을 얻는 우리들 신앙이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신다. 생명의 주님이시다. 생명은 나누어야 행복을 체험한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 다시 차려지는 오늘의 식탁이다. 

주님과 함께 오늘에 감사하며 오늘을 나눈다. 가장 낮은 곳에 더더욱 사랑의 배부름이 풍요롭다. 여기 이곳에 배불리 먹게 하시는 주님이 생명의 빵으로 오고 계신다. 참된 나눔의 참된 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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