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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1주간 목요일 -
2021년 12월 2일 (목)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는 노래가 유다 땅에서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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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 26장 1-6절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화답송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미받으소서.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복음
마태 7장 21절, 24-27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2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2일 (목)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하느님 닮아가기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이 말씀은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산상 설교에서 참행복을 선포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애로우신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는, 미사 때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이라는 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동으로 옮길 때 완성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는 것’(1티모 2,4 참조)입니다. 구원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게 될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를 이룸으로써 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그 사랑을 나누시고자 인간을 만드시어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다시 아버지께 내어 드림으로써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모습을 충만히 실현하게 합니다. 우리도 그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의 수많은 만남과 작은 일들도 사랑으로 대한다면 세상에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그 작은 만남과 작은 일들 모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질문을 늘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만큼 모든 일과 만남에 사랑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늘은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인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정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감히 말합니다.
그만큼 정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말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진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라 제 얘기라는 뜻입니다.
지옥과 천국 중에 어디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물론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하겠지만 이와는 다른, 그러니까 내 나라를 포기하고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장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선뜻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게는 아직도 제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상에 있는 나라가 아님은 말할 것 없고, 다른 사람이 네 나라 어디 있냐고 물으면 답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제 나라는 있습니다.
제 나라는 제가 주인인 나라 또는 제가 왕인 나라이며 제 마음대로 그러니까 제 뜻대로 하고 좋을 대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제 나라가 망하지 않고 한동안 이어지길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멈추고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 준비는 아직 안 되어 있는 것이 저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결단을 선뜻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이 나의 주님이 아닌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있고,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느님 때문에 못하는 것은 싫으니 망설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해드리고 존중하면서 당분간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마음인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천국의 주님이신 것은 물론이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아버지인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아들과 같고, 그렇지만 아버지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지요.
그래도 저는 뻔뻔스럽지는 않고 이런 제가 죄스럽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내 제 뜻을 포기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 뜻대로 하려 애쓴다는 것만은 어여삐 봐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 맘대로 하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안에서 그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또 믿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는 하느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전혀 주저함 없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배움의 가장 큰 적 : 자기 수준을 모르는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신 다음 결론적으로 ‘실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하십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알게 된 게 아닙니다. 나의 앎은 곧 나의 삶입니다. 실천 없는 배움은 곧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준은 정확히 내가 실천하는 것만큼만입니다.
우리는 실천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천 없이 자꾸 더 배우려 합니다. 이것이 진전을 방해합니다. 기둥만 세우다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학술발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발표자들은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가난에 대한 성서 신학적 연구, 교의 신학적 연구, 영성 신학적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신자분이 이렇게 질문해버린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연구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은 가난하십니까?”
그때 잠깐의 정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한 신부님이 유학할 때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해당하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가난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누가 “신부님은 가난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가난에 대해 나는 모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가난을 즐겁게 사셨던 분이기에 당신은 가난을 조금은 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몸이 따라가지 않는데 감히 안다고 하지 맙시다. 이런 착각이 발전을 저해하고 현학적 허세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튜브에서 저는 깜짝 놀랄 섬네일을 보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뒷모습일 보이고 가톨릭 신자도 아닌 사람이 수녀님들에게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강사는 약간 종교 다원주의나 뉴에이지 성향이 강한 가르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심만 따르면 된다고 하고 양심의 작용이 성령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지도 않습니다. 이를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혼합주의는 95%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5%의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95%이고 그 안에 5%의 독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마실 물일까요, 아니면 빨리 버려야 할까요? 이런 가르침을 수녀원에서 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게다가 관상은 “몰라!”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분은 『무지의 구름』을 읽고 자신이 주장하는 방법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구나 관상의 상태에 들 수 있다며 “여러분도 ‘몰라!’ 해보세요. 여러분 이름도 모르죠? 나이도 모르죠?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죠? 이것이 관상의 상태입니다. 가톨릭도 이렇게 누구나 깨달음이나 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불교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득도하는 것처럼 그런 가르침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영성엔 정화-조명-일치,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와 같은 순서와 수준이 존재합니다.
만약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면 어떨까요? 자전거도 못 타는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타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오토바이를 5초 동안 균형을 잡고 타다가 넘어지고 한다면 이 사람은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것일까요? 어디가 부러지고 나서는 다시는 자전거도 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수준을 무시한 공부와 기도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것을 배울 때 기쁘고 더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야 실력이 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수준은 내가 지금 ‘기쁘게 매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기쁘고 삶에 도움이 되면 그것을 하십시오. 책을 읽는 것이 기쁘거나 동영상 보는 것이 즐거우면 그것을 하십시오. 그게 내 수준입니다. 소리기도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묵상기도를 강요하면 나중엔 소리 기도까지 포기하게 됩니다. 가난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난에 대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나중엔 신학 공부 자체에 대한 맛을 잃습니다.
내가 배움의 진전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수준을 내가 잘 모르고 무언가를 배울 때입니다. 많은 경우에 소리기도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이 그것에만 머무르거나 혹은 묵상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이 관상에 도전할 때 생깁니다. 실천은 하나도 없는데 신학원에 입학하여 머리만 키울 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실천이 없는 배움은 아무 쓸모가 없고 오히려 몸에 해롭습니다.
사회에서 나의 수준을 아는 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일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0.1%의 상위 학생들의 특징은 사교육 의존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학원에 가는 이유는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머지는 혼자 합니다. 그러면 왜 일반 학생들은 학원에 갈까요?
“불안해서!”
이것이 이유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릅니다. 그냥 불안하니까 남이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력 차이를 만듭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무작정 문제집만 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를 보지 않게 되었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수학이 가장 저조한 점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많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수준에 맞는 것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공부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절제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공부를 하십시오. 나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부는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리미틀리스’(2011)는 책을 쓰는 남자 주인공이 책도 쓰지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여자친구와도 헤어져 결국엔 한 알만 먹으면 엄청난 재능이 솟아나는 약을 먹게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기억력 상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데 살인 용의자가 됩니다.
무엇이든 급작스럽게 뛰어넘으려 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약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범죄자, 혹은 자살 등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물론 ‘굿 윌 헌팅’(1997)의 ‘윌’과 같이 자신이 천재임에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청소부로 일하며 교수를 비웃는 삶을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내가 지금 해야 할 공부와 기도 수준을 알고 그래야 삶을 변화시키는 진전 있는 노력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나 공부가 끝나면 그것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느냐, 아니냐를 봐야 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될 때 그것이 진짜 나의 지식이 된 것입니다. 행동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해야 지금 나의 올바른 수준을 알고 정진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공부와 기도를 합시다. 그래야 진전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맛이나 기도의 맛이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기도의 수준만 높이려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성과 지식은 죄로부터의 벗어남과 함께 가야 재미도 있고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선택 잘 하는 방법 3가지
인생은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학창 시절에 당연히 공부를 선택해야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냐 노느냐에서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이해하기 쉽게 학창 시절을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 연령대별 ‘내 인생에서 후회는 일’을 알아보면 10대에서 70대까지 연령대별로 상위에 올라 있는 후회되는 일은 ‘공부 좀 할걸, 배우고 싶은데….’ 등 공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자기 삶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저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이 아닌 돈을 선택했다면 어떨까요? “돈! 돈! 돈!”하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더 많은 소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했기에 높은 가치를 향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은 바뀝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느 책에서 본 선택을 잘하는 방법을 소개해봅니다.
1) ‘지금 당장’이 아닌 ‘다음’의 상황을 내다봐야 한다.
2) 실패하더라도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선택을 잘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
사도시대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주님의 제자임을 사칭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별나게 ‘주님’이라는 소리를 입에 많이 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고,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드러내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모습에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의 차이는 누구를 드러내느냐에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분명 가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은 진짜 예언자입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문제를 대면하는 데 따르는 정당한 고통을 회피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통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다.
- M. 스캇 팩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
1980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윌리엄 리바인은 한 달 동안 4번이나 강도를 만나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더는 정육점을 운영하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이는 리바인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상점들도 강도의 피해로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리바인은 자신이 직접 방탄조끼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장사를 하고 있어서인지 리바인의 정육점은 그 뒤 강도의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근처 상점의 상인들이 그에게 방탄조끼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이 폭주하자 그는 정육점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본격적으로 방탄조끼 회사를 만들어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회장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절망하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으면 앞으로 크게 도약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반석과 모래 사이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실행도 있다. 저마다 가야할 길이 있다. 아버지의 뜻을 다시 묻는 새아침이다. 아버지의 뜻은 사랑의 실행이다.
시련 없는 사랑은 없다. 시련을 극복하는 것은 사랑의 힘 사랑의 실행이다. 사랑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사이에서 세워지고 무너진다. 슬기로운 사랑은 서로를 살린다. 아버지의 뜻을 밀어내는 실행이란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이 실행이며 실행이 믿음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 없이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 사랑이라는 뜻의 완성은 우리의 진실한 사랑에 있다. 이와같이 사랑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무너지게 하는 장본인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실행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이다. 이와같이 실행하는 사랑을 가르쳐주신다. 사랑이 실행이며 나눔이 사랑이다.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뜻의 실행인 사랑을 되찾아주신다.
가장 좋은 뜻과 실행 사이에 우물쭈물 우유부단한 우리가 있다. 우리의 삶이란 새로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랑의 실행이다. 작은 사랑의 실행이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있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닌 실제로 행하는 실행(實行)이다. 대림의 실행이 성탄의 완성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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