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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5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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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 -

 

 

2021년 12월 5일 (일)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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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바룩 5장 1-9절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1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필리 1장 4-6절, 8-11절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3장 1-6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바람대로, 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5일 (일) 인권주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5일 (일) 인권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이면서, 종말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길을 닦는 시기입니다. 

특별히 대림 시기 초반부에는 종말론적 성격을 부각시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종말이 임박했으니 생활 태도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언급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십오년은 기원후 28년경이며, 본시오 빌라도는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고, 그의 이복 동생인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한나스와 그의 사위 카야파는 당시 대사제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죄는 하느님을 등지는 행위이며, 죄 지은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서는 방향 전환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처럼 회개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등진 이웃을 향하여 방향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입니다. 

내 삶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마음의 움직임이 큰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나의 삶을 하느님과 나누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의 문을 열어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루카 3,4)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길을 곧게 마련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퍼뜩 드는 느낌은 당황과 난감입니다. 우선,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말부터 이미 와 계신데 무슨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지, 다음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도 주님께서 길이시고 주님의 길은 주님이 내시는 것이지 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어떻게 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러나 차분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르고 다음으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노래는 우리 성가 173번, "Veni Jesu, Amor Mi"인데 직역을 하면 '나의 사랑이신 예수님, 오소서'라는 뜻이지만 우리말로는 '사랑이신 예수님, 내 마음에 오소서'라고 의역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동네까지, 아니, 우리 집 문앞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의 문 앞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집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지 않으면 특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곧 주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우리가 스스로 열도록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유를 존중하신다면 우리도 주님의 그 숭고한 사랑을 존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종종 그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니 문제인 거지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숭고한 사랑을 감히 개떡같이 여기게 합니까? 

그제 얘기했듯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드는 교만이고, 교만에서 비롯된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입니다. 교만은 자기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도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을 포함한 다른 누구의 사랑도 우습게 여깁니다. 

또 제 잘난 맛에 살기에 주님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주인 노릇하러 오시는 주님은 거북하고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높은 산이 낮아지라는 것은 교만의 높은 콧대를 꺾으라는 말씀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면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교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나 죄책감이나 비하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보다 자기 안으로 숨어들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느님 사랑을 왜곡하는 것도 문젭니다.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벌 주시는 주님이라면 오시는 것이 두렵겠지요. 주님이 오신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둘러 숨어버리겠지요. 

그러니 이쪽과 저쪽으로 위로 아래로 굽어진 마음을 펴는 것이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오늘 복음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에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이 쫓고 있는 돈이 왜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 자크 데리다

 

 

갈등의 해소를 위해…

 

어떤 부부가 커다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투자했는데 큰 손실을 본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아내와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평상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주제에 무슨 투자야?”라는 식의 무시하는 말을 할 것이 뻔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역시 큰 손해를 본 것이었지요. 
 
아내에게 투자 실패를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남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남편의 무능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좋아요. 주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말에 남편이 기뻐했을까요?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행동에 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의에 둘 때 진정한 용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부터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찾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용서도 가능하고 갈등도 해결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6)

 

먼저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 모든 출발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출발도 도착도 사람일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람 앞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 마땅히 당연히 누려야 할 사람의 존엄함을 다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사람들이다.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신다. 사람과 함께 살려고 사람이 되셨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구원이다.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다. 소중함을 다시 배운다. 존중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인권과 구원은 사람과 사랑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원은 맞바꿀 수 없는 우리 인격을 향한 가장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보신다. 

하느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현실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은 사랑과 존중이다. 무시할 수 없는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의 삶이다. 사람의 길에 대림이 있고 사람의 성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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