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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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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2021년 12월 7일 (화)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했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암브로시오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되찾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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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0장 1-11절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8장 12-14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사의 신비로운 힘으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복된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 마침내 영원한 잔치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7일 (화)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7일 (화)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암브로시오는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라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12월 7일은 암브로시오 성인의 선종일(397년 4월 4일)이 아니라 주교 수품일입니다. 성인들은 보통 천상 탄일을 축일로 하는데,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암브로시오는 독일 트리어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서른 살 즈음인 370년에 발렌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와 에밀리아 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도지사입니다. 이들 주의 주요 도시가 밀라노였습니다. 

당시 밀라노교구의 주교가 선종한 뒤, 후임 주교를 선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통 교리를 수호하려는 신자들과 아리우스 이단에 물든 세력 사이의 알력으로 큰 혼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암브로시오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평화롭게 주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연설을 합니다. 연설 도중에 누군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하고 소리치자, 군중은 모두 그를 따라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주교로 추대된 암브로시오는 일주일 만에 세례와 견진을 받고, 이어서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으니, 그날이 12월 7일이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직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그는 열심히 성경 공부에 몰입하였을 뿐 아니라, 바쁜 사목 활동 가운데서도 늘 성경을 읽었고, 그 안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강론하여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가르침처럼,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기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하고, 신자들은 말씀을 지니고 살아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끝까지 함께 가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길 잃은 양이 아닙니다. 목자가 찾아 헤매는 것이 길 잃은 양이니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얘기하면 목자가 주인공이고 공동체가 주인공입니다. 하나가 사라졌을 때 목자와 공동체가 어찌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공동체는 목자를 따라서 길을 가는 공동체입니다. 목자를 따라서 공동체가 같이 길을 가는데 아흔아홉 양은 목자를 잘 따라가는데 한 마리 양만이 무리에서 이탈하여 어디를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얘기는 개인의 얘기가 아니라 공동체 얘기이고, 공동체로서 목자를 따라 어디를 가는 어느 공동체의 얘기이며 무리에서 이탈한 구성원 중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버리고 갈 것인가 끝까지 찾아서 같이 갈 것인가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우리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우리 공동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공동의 목적지가 있습니까?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까? 

안내하는 목자가 있습니까? 

그 목자가 예수님입니까? 

목자를 공동체로서 잘 따르고 있습니까? 

각자 따라가고 이탈자들이 많지는 않습니까? 

허약하거나 불목 때문에 도중에 이탈하려는 자가 있을 경우 어떻게 하는 공동체입니까? 

이런 성찰을 하다보니 제가 매년 하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이 생각납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전처럼 할 수 없었지만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전처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한여름 더위를 전처럼 잘 견딜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제가 잘 이끌고 갈 수 있을까 그런 걱정입니다. 힘이 떨어지면서 포용력도 떨어지는 저를 부쩍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동안 행진하면서 저는 한 명의 낙오자와 이탈자가 없도록 챙겼습니다.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도 그런 싸인을 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잘 걷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과 힘들어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걷게 하였으며 그럴 때 건강하고 잘 걷는 사람이 약자 때문에 힘들어 불평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을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 약자를 격려해야 했지요. 

이런 것이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기에 곧, 인내력보다 포용력이 더 힘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부족하기에 이제는 망설이는 것입니다. 

지난 번 김장을 할 때나 지난 주일 삼회 월례회를 할 때 제가 부쩍 짜증을 내고 야단을 치려고 하는 저를 발견하고 반성을 했는데 전에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너끈하게 해내던 것들이 이제는 버거운 것이고 그래서 같이 일하는 동반자들을 너그러이 품지 못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사랑이 부족하고 그래서 포용력이 부족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한 마리의 양도 내버려두지 않고 다 데려가시겠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훌륭하고 좋으신 목자를 따라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하느님 나라로 가려는 공동체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웃은 나의 거울이다 ;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내용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기쁨’ 때문입니다. 그 양을 찾으면 기쁘지만, 그 양을 찾지 못해도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나 자신이 누구냐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었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내가 믿는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행복은 세상 것들을 소유함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항상 내 자존감의 수준으로 수렴합니다. 승진하여도,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이혼하더라도 몇 달 뒤면 지금 수준의 행복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 행복함의 수준이 나의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나의 자존감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까요? 내가 이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로 측정됩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을 그리스도로 보면 나도 그리스도의 자존감을 가진 것이고, 내가 이웃을 가치 없게 생각하면 나도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가하는 내 가치대로 이웃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 나를 돼지로 보는 사람이 이웃을 어떻게 부처로 볼 수 있을까요? 이웃을 돼지로 보면 나는 어디에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대화에서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큰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맞는 말입니다. 

영화 『디 아더스』(2001)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선 뒤 아이 둘을 데리고 저택에 사는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빛을 보지 못하는 희소병을 앓고 있어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가정교육과 돌봄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하인 세 명이 온 이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유령을 보았다고 말하며 엄마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엄마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상한 일들이 자꾸 발생하면서 하인들이 집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알고 결국 하인들을 쫓아냅니다.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하인들은 영매(무당)가 빙의하여 그들을 만난 유령들입니다. 이 말은 유령이 아니면 엄마와 아이들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영매를 통해 엄마와 아이들을 집에서 떠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사실 엄마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아이들이 죽은 것을 알고 자신도 자살한 유령입니다. 이 유령들이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자신들은 살아있고 이웃들은 모두 자기 집을 빼앗으려는 유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령이니 이웃도 유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을 보는 그대로 나도 나를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유령처럼 보면 나도 유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울에 손을 넣어 나의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부처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자존감을 높여주시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우리는 멀찍이서 우리가 그분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웃도 그리스도로 보입니다. 이 마음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웃이 모두 유령으로 보이면 그 사람은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모두 그리스도로 보이면 그 사람은 천국에 삽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이 됩니다. 

김하종 빈첸조 신부님의 『사랑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이란 장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사제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가장 가난한 한 사람을 목자와 양으로 만나며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이 이야기는 우리가 왜 어린 양 한 마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옮겨봅니다. 

"내 사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1992년 맑고 화창한 계절의 어느 날 찾아왔다. 당시 나는 성남 상대원동과 은행동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빈민 사목’을 하고 있었다. 주로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장애인들의 집을 방문해 도움을 드렸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며 집에 찾아갔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다. 어둡고 곰팡내 가득한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들어오세요. 문 열려 있습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였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있는 오십 대 아저씨를 발견했다. 

나는 아저씨 옆에 앉아 살아온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이십 대 시절,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이웃 사람들이 나를 생각해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고 아니면 굶어요”라고 했다. 

30여 년 동안 혼자서 그렇게 살아오셨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떤 도움이든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고 하셨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요강을 이용하고 있었다. 냄새가 심해 우선 요강부터 닦았다. 방 청소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바닥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치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응했다.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어떤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그 목소리가 예수님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임을 확신했다. 내가 삶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곳은 바로 어둡고 곰팡이 가득한 지하 방이었다. 그분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웃의 헐벗은 삶은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였다. 예수님은 지하 방의 삶을 통해 그분의 상처를 보여주고 계셨다.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그 상처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치유해 주기 위해서다. 내 삶을 내놓으며 이웃들의 상처를 내가 품기 위해서다. 버림받은 이들, 가난한 이들, 고독한 노인들, 가정으로부터 도망 나온 청소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피 흐르는 상처다.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찬미한다."

김하종 신부님이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면서 결국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도 그리스도로 보게 되었다면 그 냄새 나는 덥고 좁은 공간은 천국이 됩니다.

억지로라도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보는 거울도 나를 보고 활짝 웃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네히라 케노스케의 책 제목처럼 거울은 먼저 웃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어떤 형제님이 종합검진을 받은 뒤 암으로 의심된다면서 다시 검사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암으로 의심된다는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의 부모님도 암으로 돌아가셨기에 더 큰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생길 수 있지? 우리 애들 장가, 시집가고 예쁘고 귀여운 손주도 봐야 하는데…. 하필 왜 나인가?’ 
 
평소 건강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암일지 모른다는 말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건강한 사람들과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혼자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요즘 의학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데….”라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자신과 상관없는 말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고통과 시련 속에 있었던 병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당시에는 죄의 결과로 ‘병’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병자와 건강한 사람의 구분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려고 더 노력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바로 길잃은 양 한 마리로 비유하면서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였던 팔레스티나는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평화로운 땅이었습니다. 목장주가 자기 소유의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지요. 양 백 마리는 보통 한두 사람이 칠 수 있는 양의 무리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마리 정도는 언제나 길을 잃고 딴 곳으로 없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양이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목동은 잃은 양 한 마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비유에서는 안전한 99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마음 씀씀이의 문제입니다. 즉, 안전함이 보장된 양보다, 길 잃은 양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목동의 마음가짐이 길 잃은 양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길 잃고 안전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당시의 병자들이고 세리, 창녀와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사회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분리의 장벽을 허물고 당신 안에서 계속 사람들을 일치시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오래가는 행복은 정직한 것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 리히텐베르크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사는 것

 

사회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주식’을 하는 친구들이 꽤 많더군요. 친구에게 왜 주식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재테크 수단 중에서 그래도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주변에 주식으로 이익 본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할까?’ 
 
학창 시절 모두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은연중에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두 공부를 잘할 수는 없는 것처럼, 모두가 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운 이상의 무엇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꼭 ‘행복한 사람’이라는 도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만큼의 기쁨을 가져다줄 무엇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행복을 위해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사는 것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마태 18,12)

 

끝내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되찾아 오시는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길 잃은 우리를 찾기위해서 더 깊숙이 더 아래로 내려오신다. 사랑하기에 찾아 나서시는 주님이시다.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시기에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란 없다. 가지 못할 길은 없다. 길을 잃었기에 되찾는 기쁨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다. 버려지고 잊혀지는 사랑이 아니라 이 대림시기는 다시 찾게되는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란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주시는 따뜻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이다. 우리가 기쁘면 주님께서도 기쁘시다. 찾아 나서시는 방향이 사랑의 참된 방향이다. 찾아 나서시며 길을 다시 만드신다. 

따뜻한 사랑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 죄인의 발자국까지 덮어주시며 그 발자국 위에서 새 길을 만드신다. 그 새 길 위에 우리가 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이다. 

오고 가는 길 위에 아름다운 삶이 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을 잃어버린 지를 일깨워주시며 길 잃은 한 마리 양인 우리를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둔 채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이시다. 

그래서 삶이란 길을 잃은 사람들이 사랑을 다시 만나는 사랑의 가장 기쁜 노래이다. 한 마리 양을 찾아 메고 오시는 가장 기쁜 노래소리가 들리는 대림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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