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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6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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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2021년 12월 6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고쳐 주시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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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35장 1-10절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5장 17-26절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6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6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20)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곳에는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습니다. 그때 남자 몇 명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여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20)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개인의 고통이나 중풍과 같은 병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의 인과 관계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죄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느님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기에, 죄인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분의 치유 은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치유 선언 대신 사죄를 선언하심으로써 바로 당신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참된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특별히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죄악들을 더 깊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로서 주로 정결례 규정을 지키는 데 열성적인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 법들을 더 잘 지키도록 강요하며,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유다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유배 이후 이스라엘에서 율법 해설에 전념한 상류 계층의 율법 전문가들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경 밖의 전통을 발전시켰고, 소송 문제에서 재판관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이들 안에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것을, 돈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봅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뚫고 하느님께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함께 찬양하는 일이 많아지기를...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사람들이 참으로 많을 겁니다. 복음을 보면 여러 군데서 '모두 고쳐 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오늘 중풍 병자의 치유처럼 특별하게 언급되지 않은 치유 사건이 많다는 건데 그렇다면 모든 공관 복음이 오늘 이 이야기를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 가지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 자리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와서 오늘 치유 사건에 깨소금을 뿌렸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 치유 사건이 특별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루카 5,17)

그러니까 이스라엘 모든 지방과 모든 마을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중풍 병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는 자기의 필요 곧 병의 치유 때문에 왔는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왔을까요? 

그리고 중풍 병자는 병의 치유 뿐 아니라 죄의 용서까지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갔는데 이들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이들의 입에서 하느님 찬양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튼, 같이 주님께 왔지만 이렇게 다른 두 부류 곧, 구경하러 온 부류와 치유받으러 온 부류가 있으며 실은 우리에게도 두 부류가 있고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말하자면 우리도 같이 성당에 오지만 어떤 사람은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가는 데 비해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맹숭맹숭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도 교훈 삼으라고 복음은 이 이야기를 특별히 취급하는 겁니다. 

공관 복음에서 오늘 얘기를 특별히 취급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합동 치유이고 이들의 믿음과 열성이 남달랐기 때문이며, 지금의 우리도 이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나만 하느님께 가고, 나만 하느님께 복을 받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신앙이 마치 요즘 혼족들의 혼밥과 혼술이 많은 것처럼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웃 사이에 아무런 사랑 없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지만, 설사 받는다 해도 그 복이 복일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말하고 거듭 말하지만 치유만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치유에다 구원까지 받아 하느님을 찬양하는 복이 참복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는 복이야말로 참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는 말로 끝을 맺는데 우리도 가족 간에 그리고 이웃 간에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 많아지기를 기원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죄는 왕권과 관련된 문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병의 치유보다는 죄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병의 치유와 함께 일어납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있었던 그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죄책감을 들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갖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나쁜 것이고 죄의식은 좋은 것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을 구분하는 법은 단순합니다.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죄의식은 신에게 용서받으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희한하게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나의 선택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매우 어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용서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인데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자아를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자기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나’와 ‘심판하는 맛을 즐기는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둘 다 결국 자신이기에 나는 슬프면서도 기쁜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죄를 지으며 내가 자아를 더 높여준 까닭에 나는 ‘자아의 기분’을 더 따라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모두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풍 환자처럼 영원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구원이란 내가 왕으로 치켜세워 그것으로부터 심판받는 나를 불쌍히 여겨 자아의 왕관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힘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늘 중풍 병자의 모습입니다. 

요즘 넷플릭스 ‘지옥’이 인기이다 보니 지옥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이비나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오늘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심판보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심판을 무시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문제는 ‘구원’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지옥 고지를 받으면 그냥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책감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있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을 알게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죄를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은 바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서로 심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사람을 심판하거나 어떤 목표를 이뤄내기 위한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지’(無智)에서 나옵니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어떤 일에 있어서 내가 나의 탓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은 항상 우월한 사람이 더 낮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내 안에 나를 심판해도 된다고 허락해 놓은 우월한 존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우월한 존재가 자아임을 압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왕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을 주님 앞에 놓이게 만들어 ‘죄의 용서’를 받게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게 만드는 이유는 자기의 죄가 자아의 탓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그놈의 왕관을 벗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분을 새로운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가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이라면 죄의 용서는 그 왕관을 벗겨 그리스도께 씌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자아의 왕관을 빼앗아 주님께 드리고 자아를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는 것입니다.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나폴레옹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07년 완성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마치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생생한 사실적 표현이 일품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당대 사람과 참석자들은 대관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 상황과 세부적인 표현이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대관식이 가장 잘 보이는 발코니에서, 위엄 있게 차려입고 대관식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귀부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귀부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레티치아입니다.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책이라 생각했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폴레옹이 권유한 정략결혼도 거부했다가 쫓겨나다시피 했던 남동생 뤼시앵의 편을 들었습니다. 

레티치아가 나폴레옹에게 돌아온 것은 나폴레옹이 폐위된 뒤였습니다. 이를 두고, 레티치아의 전기인 『나폴레옹 어머니 레티치아』에서는 레티치아가 무조건 가장 고난에 처한 아이의 편을 든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뒤쪽에 흰 제의를 착용하고 앉아 있는 인물은 교황 피우스 7세입니다. 교황이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친히 파리까지 왔지만, 나폴레옹은 결국 스스로 관을 써버렸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한 그 인물입니다. 이런 일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인지, 피우스 7세는 대관식 내내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교황은 손을 들어 친히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손짓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의 스케치 단계에서도 교황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지만, 레티치아 부분과 마찬가지로 도중에 일부러 훨씬 노골적으로 나폴레옹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쪽으로 그림을 수정한 것입니다. 

[출처: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다음 블로그, ‘이리에시아의 이야기’]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죄는 자기 스스로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교회도 어머니도 저버린 죄를 어떻게 갚으면 될까요? 어머니에게 돈을 많이 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교회 건물을 지어주면 될까요, 혹은 그림만 수정하면 될까요? 

왕관을 벗어 교회에 주며 교황과 어머니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죄에서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의식을 갖게 할 진정한 믿음을 가진 친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폴레옹이 스스로 쓴 왕관에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폴레옹의 믿음이 한순간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렸을 때는 신앙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겠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씩 뜨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가 익어버리는 것처럼 영원히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때 첫 고해를 했을 때의 죄의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의 힘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자아의 왕관이 벗겨져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를 쉼 없이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인입니다. 누가 화가 없고 성욕이 없고 소유욕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의식을 심어주시는 이유는 끊임없이 용서를 청함으로써 자아에 왕관을 씌워주지 못하게 하심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의 죄의식을 고취해 사람들을 고해성사실에 보내는 이들이 오늘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나요?

 

한때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 생각납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교 교수가 볼티모어의 빈민가에 사는 200명의 청소년을 만난 뒤에 그들에 대한 미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너무 가난해서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5년 후, 다른 사회학 교수가 이 평가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사람들을 제외한 180명 중 176명이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자, 한결같은 답변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된 선생님을 찾아가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 비결을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사랑보다 더 큰 교육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교육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성공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온 갈릴래아 땅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주옥같은 말씀과 놀라운 표징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편인지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같은 편이라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계속된 충돌이 일어나는데, 오늘 복음이 첫 번째 충돌이었습니다. 즉,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입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 이름조차도 들먹일 수 없을 만큼 지엄하신 분인데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시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지는 중풍 병자를 보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는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셨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으며,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 생텍쥐페리 (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

 

 

생명을 지키는 노력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로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낮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책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쉽지 않은 문제라고 하더군요. 
 
세계보건기구 연구 결과를 보면, 1명이 자살할 때 주위의 5~10명에게 자살 충동을 심어준다고 합니다. 국내의 경우 하루 40여 명이 자살하므로 200~400명에게 자살 충동이 유도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가족은 어떻겠습니까? 그 자살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찾게 되고 그래서 뒤따라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은 자신을 사랑해 준 많은 영혼까지 함께 죽이는 살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겠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생명의 영역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 생명을 지키는 노력이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루카 5,26)

 

우리의 오늘은 그냥 오늘이 아니다. 어느 누군가의 소중한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은총의 살아있는 오늘이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참된 용서의 날이며 어루만져 주시는 치유의 오늘이다. 

내어놓기 싫은 아픔을 내어놓는 것에서 용서는 시작된다. 용서는 믿음과 함께 가난한 이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아픔도 예수님같이 아래로 내려와야 서로를 살리는 믿음이 될 수 있다. 

믿음은 주님과의 소통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도 소통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끝내 용서를 알게되는 소통의 오늘이다. 용서는 막힘 없는 복음의 소통(疏通)이다. 그래서 맡겨드려야 할 복음의 오늘이다. 

아픔과 믿음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우리들에게 용서를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서로 우리 일상의 관계는 다시 은총이 되고 다시 건강한 소통이 된다. 우리에게는 용서의 평상(平床)에 실려 우리를 주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내는 믿음의 이웃들이 있다.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믿음과 용서의 공동체이다. 오늘이 신기한 것은 함께 살아가며 맛보게 하시는 용서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기쁘고 고마운 것이다. 즉시 일어나 믿음을 들고 용서의 하느님을 찬양하는 용서의 오늘이다. 용서가 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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