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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9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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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2021년 12월 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의 구원자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으며, 그는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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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1장 13-20절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1장 11-15절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9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9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하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 나라가 폭행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율법 해석으로 하느님의 통치에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려 그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태 23,13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 나라를 거절하였음을 증언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하늘 나라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불순종과, 하늘 나라의 온전한 도래의 방해를 나타냅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95면 참조).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올바름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영토나 체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아픔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과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다른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가슴에 품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홍승의, 『푸른 물고기』, 40면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늘로부터 키재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물론을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세례자 요한이 세종대왕이나 징기스칸보다 위대한 것은 물론 구약의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위대한 예언자들보다도 위대하고,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보다도 위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위대함의 기준을 생각하게 되는데 우선 세속적 기준과는 다릅니다. 

세속적 기준은 당연히 하느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고 이 세상에서의 성취나 업적이 그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둘로 나뉠 것입니다. 곧 자기 성취형과 사회 공헌형입니다. 

자기 성취형은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델처럼 세상을 넓게 정복한 자들이고, 그러기 위해 힘을 키우고 그 힘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며 많은 사람을 죽인 자들이고 세례자 요한도 이런 자들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대표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회 공헌형은 그 반대로 사람을 살리는 데,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나 위대한 발명가들도 이 부류입니다. 

이런 사회 공헌형의 사람들이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보다 당연히 위대하다고 하겠지만 하늘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이들이 결코 위대하지 않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 크기를 잴 때 땅으로부터 재지 않고 하늘로부터 재는 것, 곧 키재기가 땅으로부터의 키재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키재기입니다. 

또 하느님 은총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많이 공헌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더 이바지하는데 하느님 은총은 이 세상에서 크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 곧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거라고 했는데 물은 높은 곳에 고이지 않고 아래로 흐르고 흘러 가장 낮은 곳에 고이고, 그래서 가장 낮은 바다가 가장 크다는 뜻의 얘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상선(上善)은 프란치스코가 지상선이라고 한 하느님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 영성 강의를 하면서 프란치스코가 말한 지상선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더니 지상선(地上善)이라고 하여 웃은 적이 있는데 프란치스코가 말한 지상선은 상선 중에서도 상선이라는 뜻이며, 이 지상선(至上善)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고 그래서 모든 선이 거기서 나오는 하느님이 상선 중의 상선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기준에서 위대한 인물은 성인들인데 성인들 중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장 위대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러 오신 당신 앞길을 마련했기 때문이고, 주님은 커져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언자는 주변인인데도 외롭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일까요? ‘경계에 선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고 천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보다 낮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레스트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지만 하늘의 가장 낮은 곳보다 낮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언자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친구들이 생깁니다. 그 친구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를 그 경계선에서 합니다. 

요즘 읽은 책,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러 온 경계인으로서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모습을 김 신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을 떠나 한국에 왔지만 한국에서도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소외감은 익숙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스파게티’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마피아’라고 불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나를 ‘촌놈’이라 불렀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투오밥’(백인)이라 불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90년대 총, 눈이 내리는 일요일이었다. 성당 앞마당에 축제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밴드 연습이 한창이었고 한복을 입은 몇몇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의 리듬은 하얀 눈발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할머니를 한 분 모시고 내게 왔다. 사제에게 축복받고 싶어 하는 할머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외국 신부한테서는 축복받기 싫네’하고 어깨를 돌리셨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여러 지역에서 겪었던 일이라 적응할 때가 됐는데도 말이다. 

집에 돌아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국인, 순례 그리고 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보면서 ‘외국 사람’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의 얼굴, 눈, 피부색은 한국 사람과 다르구나. 나는 이 땅에서 아직은 ‘손님’에 불과하구나.’”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내 턱수염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서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의 전통이 있어 젊은 사람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네. 수염을 깎아요.’

나는 곧 답을 드렸다. 

‘네, 깎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수염을 깎았다. 사실 내심 멋진 수염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수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국 문화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김 신부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거나 통장에 거액의 돈을 가지지 않고서는 취득할 수 없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노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한국에 함께 온 마우로 신부님과 나는 한국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사실 난 쌀 요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먹어본 김치는 신맛이 강했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양념들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맛이었다. 특히 찌개와 떡은 너무 낯설었다. 

세네갈에서 봉사할 때 나이 드신 선교사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이 나라 언어가 배우기 쉽다고 할 것이고, 사람들도 너무 착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보내신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언어가 너무 어렵다고 할 것이고, 음식도 맛없고 이 민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맛이 없다고 느꼈구나.’

그 말씀을 떠올린 후 한국 음식들을 사서 맛보며,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국 음식의 참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음식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고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쌀밥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밥을 전해주는 신부가 됐다. 정말 먹기 힘들었던 음식 두 가지였던 ‘찌개의 떡’은? 내가 지금 가장 잘 만드는 요리는 ‘김치찌개’다. 노숙인 친구들도, 함께 사는 신부님들도 내 솜씨를 인정해준다. 그리고 특별한 날, 떡이 빠지면 섭섭하다. 나는 같이 환갑을 맞은 노숙인들과 환갑잔치를 함께 했는데, 무엇보다 많은 분과 떡을 나누어 먹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3년 넘게 노모와 형제들, 조카들을 보지 못한 김 신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도 한국의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조금은 열심히 따르는 우리가 모두 어느 정도 겪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겸손한 이들이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경계지역엔 아무나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비가 없어 학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자들과 공부반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직도 이탈리아 국적으로 한국에서 주변인으로 느끼면서도 열심히 한국의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려는 중이었습니다. 

처음엔 영어만 가르쳤는데 그다음엔 수학, 국어, 농구 교실, 기타 교실, 영화 감상 교실 등도 운영했습니다. 봉사자 40명이 모였고 총 72명의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이러는 사이 아이들도 외국인 신부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신부님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199년 무더운 여름, 나눔 교실 아이들이 학부모를 대동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감사패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감사패에는 72명 아이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고 중앙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목련마을 청소년 나눔 교실 지도 신부로서 정열과 성의를 다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72명의 뜻이 담긴 이 패를 드립니다.’

신부님은 감사패를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맑게 웃던 아이들, 마음 한편에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자리했구나. 머리를 맞대고 나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오래 생각했구나.’

김용규 님의 『나답게 사는 지혜는 숲에 있다』에서 숲에도 경계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숲과 바다, 혹은 숲과 도시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가려면 경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열려 있기에 자유롭습니다. 

이 경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커다란 나무보다는 작은 관목들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한 부드러운 가지를 좋아하는 고라니나 산토끼, 이빨을 수시로 갈아야 하는 들쥐나 설치류들도 많습니다. 사람들도 산나물 등을 채취하기 위해 많이 드나듭니다. 

따라서 이 경계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가시를 지닌다고 합니다. 자신을 동물들에게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이 동물들과 덤불들은 서로 도와가며 이 경계지역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합니다. 

김하종 신부는 고향을 떠나 한국인이 되어 한국에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한국 국적을 한국에 온 지 2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받게 되었습니다. 법무부에서 특별 공로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두 명 중 한 명에 뽑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지역에 머물며 어쩌면 숲 한가운데에서 함께 몰려다니지만 결국은 외로운 인간관계가 아닌 겸손한 작은 이들을 보호하는 작은 가시덤불이 되어 더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을 연결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단절되는 아픔도 있지만 결국 그 경계까지 도달한 겸손하고 작은 사람들과 공생관계를 맺는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 몸에서 난 가장 큰 사람이면서 하늘 나라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은 예언자직을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정한 변화는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방학을 마칠 때쯤 되면, 학생들은 집에서 방학 숙제를 하느라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밀린 방학 숙제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일기 쓰기’였습니다. 일기의 장점이 많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문장력이 좋아지고, 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강압적으로 쓰는 일기라서 그런지 항상 일기 쓰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자신의 고칠 점을 하나씩 적어나가면서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는데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실천을 통해서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면서, 늘 뒤로 미루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특히 주님의 일을 지금 당장 행하는 우리가 될 때, 후회하지 않는 삶 그리고 가장 행복한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광야에서 살았고 그의 말을 들으러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갔습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이 본 요한은 바로 예언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며, 요한은 예언자 중에서도 보통 예언자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언명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광야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훌륭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제자들, 그들을 도와 초대교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믿음을 같이 했던 교우들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지금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인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 마크 트웨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드러났지만, 우리나라 양궁은 세계 1위가 분명합니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다는 것보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선발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유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동이(東夷)라는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활쏘기를 많이 해서일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훈련에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꿈틀대는 방 안에 가둬져 다리를 타고 뱀이 기어오르는 섬뜩함을 참아내고, 뜬눈으로 꼬박 3일을 버티기도 한답니다. 이런 극기 훈련을 하는 이유는 경기 중에 일어날 모든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활을 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많은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외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마태 11,12)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들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다시 묻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 나라가 되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되는 깨어있는 대림의 아침이다. 사랑과 폭행 감사와 폭력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폭행을 당해도 하늘 나라는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 적나라한 역사 속에서 만나게되는 우리들의 광기어린 모습이다. 

하늘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다. 준비하고 기다린다. 폭행을 바꾸는 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선물이 되듯 기다림이 성탄이 된다.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밥이 되어주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아프게 반성한다. 폭행을 치유하는 반성의 밥이다. 

폭행의 허기짐을 멈추게하는 기다림의 사랑이다. 사랑을 딛고 일어서는 사랑이다. 삶의 자세를 고치는 것이 준비하는 삶이다. 함부로 살았던 삶이 소중한 하늘 나라를 대하듯 소중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뀌는 기쁨이다. 

폭행을 벗고 기다림을 가짜를 벗고 하늘 나라를 사랑할 일이다. 폭행과 탐욕을 치유하는 하늘 나라의 사랑법은 깨끗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하늘 나라에서는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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