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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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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2021년 12월 11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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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집회 48장 1-4절, 9-11절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저희를 살려 주소서.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7장 10-13절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1일 (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죽음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살펴보기.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은, 말라키 예언서 3장 23-24절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 3,23-24)

유다인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산 채로 하늘로 올랐기에, 메시아께서 오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요, 예언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 

요한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고, 위정자들의 악행을 비판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렸다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먼저 와서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듯,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또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으니, 예수님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세상 종말의 도래에 필요한 준비 작업인 회개와 쇄신을 외치는 요한의 소리를 우리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대림 시기와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지내며, 세례자 요한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곧 죽음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일과 사람, 각종 오락과 즐거움에 파묻혀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니 다만 30분이라도 멈추어 봅시다. 잠시 멈추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자기 비움, 함께함, 나눔,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바라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바로잡아주는 사람

 

오늘 집회서는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다시 오리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거짓을 바로잡은 것같이 세례자 요한도 그러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싸워 이겼지만 세례자 요한이 싸워 이겼나요? 살해당했으니 싸움에 진 것이고 그러니 바로잡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요? 

다시 돌아온 엘리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고 하시며 당신도 같은 운명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잘못이나 거짓을 바로잡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든 수난을 당하든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도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벨에게 쫓기지 않았습니까? 도망가지 않았으면 그도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설사 알아봤더라도 사람들이 바로잡는 사람을 내버려둘까 생각합니다. 

한번 나에게 적용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가 나를 바로잡아주면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겠습니까?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여기서 성인은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성숙한 어른이라는 뜻의 성인(成人)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의 성인(聖人)입니다.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사람은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에 당장은 비록 입에 써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마워할 터인데 그건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싫어하는 것을 욕먹어 가며 바로잡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해코지까지 당할 것 같으면 더더욱 바로잡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나를 바로잡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사람도 웬만한 사람은 한두 번 바로잡아주다 통하지 않으면 나를 포기하고 떠나는데 계속 옆에 있으면서 잡아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진정 사랑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진정 지혜로고 성숙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작년에 어머니께서, 그리고 올해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동안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또 하늘 나라에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의 무상함도 크게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들고, 순간의 만족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 한 직후는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노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찰나의 즐거움이 모여서 내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야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엘리야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재림도 영광 속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는 메시아관은 고난과 부활이 함께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막연한 영광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어디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특별한 상황,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상황만을 요구하지 말고, 매 순간에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인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고질적인 질병은 육체적 쾌락이 고통을 능가하도록 허용한다.

- 에피쿠로스

 

 

타고르의 시 : 열매 줍기

 

열매 줍기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성 타고르의 멋진 시입니다. 솔직히 이런 기도를 잘 바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12)

 

신앙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의 빈약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에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는 마음의 대림이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는 거기에 아파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또 아파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성탄의 길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사랑이다. 

목숨을 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뻣뻣한 교만이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애타게 오시는 예수님을 늘 배척하는 우리들이다. 

끝끝내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을 알 턱이 없다. 우리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하느님께는 늘 야박하다.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을 하느님께로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고난을 동반한다. 아픈 것과 더 아픈 것 사이에 우리가 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엘리야도 요한 세례자도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아픈 시간이다. 신앙은 소모품이 아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사랑해야 할 인격이다. 그래서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의 대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닌 버려지는 신앙을 되찾는 한줄기 간절한 마음이다. 

먼저 와야 할 것도 마침내 와야 할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다. 마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제멋대로 다루는 아픈 마음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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