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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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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2021년 12월 1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순교 사실을 전하는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루치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했습니다. 그러나 동정을 결심하고 있던 루치아는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에 따라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했습니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며,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는 하느님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지 묻는 이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물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3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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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민수 24장 2-7절, 15-17절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그 무렵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1장 23-27절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루치아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주원 미카엘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3일 (월)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황주원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3일 (월)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서로에게 빛이 되는 오늘이다.

 

루치아 성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워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하였으며,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어머니는 성녀를 한 귀족 청년과 혼인시키기로 합니다. 루치아는 오랜 기도 끝에 동정의 뜻을 밝히고, 어렵게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혼인 지참금마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루치아에게 청혼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소유가 될 재산이 사라진 것에 분개하여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며 로마 제국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루치아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재판관은 도저히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음굴로 보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여러 남자와 소 떼까지 이용해서 루치아를 끌어내려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침내 긴 칼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성녀가 고문을 받을 때 눈이 뽑히기도 하였는데, 천사의 도움으로 이를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치아 성녀는 자신의 두 눈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이름의 뜻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 공경받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어둠 속을 헤매는 우리 인간에게 빛이 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걷게 해 주십니다. 그 빛은 나눌수록 커지고, 그 따뜻함도 커집니다. 성인 성녀들은 빛을 받아들이고 또 그 빛을 나누는 모범을 보여 준 이들입니다. 

오늘 루치아 성녀를 기억하며,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빛이었는지, 또 어떤 일을 하면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인 노안

 

오늘 독서 민수기는 발람의 신탁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노인일 수도 있고, 그의 눈은 영적인 노안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본래 거짓 예언자이고 모압 임금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주님이 그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고 저주 대신 오히려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들을 얻습니다. 신앙인에겐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느님이 뜻이듯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것이 보일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른 눈을 주시어 보게 하시는 것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른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른 귀를 주시어 말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눈이 멀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노안이 되면 그리되는 것처럼 영적인 노안도 목전의 이익은 보지 못하지만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저도 발람처럼 본래 거짓 예언자이고 점차 나이를 먹어 눈이 흐려져 가까운 것은 못 보고 귀가 어두어져 가까운 소리 못 들어도 부디 주님께서 다른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멀리 하늘을 보고 듣게 되기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이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도 당신을 대하신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이런 일이 거의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인데 짧게 정리하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큰 회사의 회장이 은퇴하고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집에서만 있기가 무료한 회장은 아들의 회사에서 주차관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회장은 그렇게 회사를 위해 작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회장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회사에 늦게 도착하고는 차 열쇠를 던지며 주차해달라고 하고 열쇠를 다시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그것은 저희가 할 일이 아닌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직원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며 화를 내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회장은 꾹 참고 그 사람이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자신이 사장과 아는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잘라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장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어쩐 일이시냐며 인사를 했습니다. 비로소 사장의 아버지, 곧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그 직원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절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나의 세속-육신-마귀는 죽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돈 있고 권력 있는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기에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갚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그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엔 사장 친구의 꼴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된 이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소속-육신-마귀가 그리스도로 향하는 길의 걸림돌이기에 자신이 몸소 가난하고 정결하고 겸손해진 이들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도 그렇게 대해주십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은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케이트라는 애인을 떠나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잭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3년 뒤 큰 투자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는 그는 성탄절도 즐기지 못하고 일합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가난한 삶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아내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이 주는 행복에 젖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쯤 눈을 뜹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일도 집어치우고 성공을 위해 버렸던 자신을 떠나 비행기를 타려는 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행복은 욕심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케이트입니다. 케이트에게 대하는 대로 행복도 잭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대신 돈이 행복이라는 마약으로 순간적인 쾌락은 허락합니다. 하지만 케이트를 잠시만이라도 받아들이면 욕심이 없는 행복을 맛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사랑과 행복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림과 행복이 그렇듯, 요한과 예수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절제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꼭 붙드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사랑이요,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하늘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너도 내 딸이다”라며 맞아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낯선 지역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펼쳐놓고서 어떻게 가장 빠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공부했지만, 이제는 전혀 공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목적지로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신부의 차를 탔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대로 운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즉, 막히는 곳으로만 안내한다면서 아는 길의 경우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믿어야 내비게이션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믿어야, 하늘 나라에 가는 길을 잘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틀 동안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로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은 곧 성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율법 학자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생활 방법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관, 율법 학자, 원로들은 이 교도권 문제를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질문하시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배척했으니 하느님께 불충한 자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터에 자신들이 법적으로 처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거짓 예언자는 돌로 쳐 죽여야 했고, 참 예언자를 거부하는 행위도 같은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믿음이 없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 콩도르세 (Marquis de Condorcet)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법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를 떠올린 다음, 그 친구와 나를 비교합니다. 특히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친구는 가졌지만, 나는 갖지 못해 부러운 것.” 
 
60초 안에 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과의 비교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면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만 하지 않아도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도 나만의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절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비교는 남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족한 부분의 나와 이를 채워 나가는 나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불행의 단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마태 21,25)

 

색깔만 바꾼다고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짓밟힌 길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하신다.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아둔한 교만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을 또 다시 놓치며 우리는 살고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이정표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깨어지는 아픔 없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뜨거운 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변화이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교만이다. 깨어져야 할 한 줌의 교만이다. 사람의 길은 끝이 있지만 하느님의 길은 영원하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나는 사랑이 참된 빛이다. 서로에게 빛을 줄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세례는 우리에게 빛을 준다. 다시 태어나는 세례의 기쁨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세례와 성탄의 여정이다. 

깨어지는 것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벗어나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움의 초대 대림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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