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2021년 12월 15일 (수)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는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이사 45장 6ㄴ-8절, 18절, 21ㅁ-25절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6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7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8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21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22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23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24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25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화답송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복음
루카 7장 18ㄴ-23절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그때에
18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19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주원 미카엘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5일 (수)
황주원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5일 (수)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성탄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약속되신 분이신지 여쭙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당신께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세상 종말의 심판을 바탕으로 하는 회개를 가르치기에, 심판자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기보다 병든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불러 모으시어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이십니다. 심판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세례자 요한에게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은 아마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께서 오시기로 한 그분이신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 시기는 생일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매우 친밀한 관계일 때 누군가의 생일을 준비하고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생일잔치에 함께하려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며, 그분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잘 생각해 보면 대림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더 알려고 노력하고, 그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더 알아보고, 그 일을 귀하게 여겨 나도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도 불행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밖에는 주님이 없기에 당신이 빛과 어둠, 행복과 불행의 주님이시라고 하십니다.
빛과 어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당신 아닌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서 찾지 말아야 함은 물론 다른 신에게서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기에 불행하고, 사람 덕분에 행복하려고 하다가 불행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의 행복은 사람에 의해 불행해집니다.
누군가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그가 몸을 빼면 쓰러지고, 누군가의 손에 매달린 사람은 그가 뿌리치면 떨어지겠지요?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난달 타계한 존 아티스는 19세 때에 백인 3명을 살해했다는 누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난치병에 걸려 손가락 발가락 7개를 잃고 15년 만에 가석방됐지만, 통증을 견디려고 코카인에 의지했다가 다시 체포돼 6년형의 가중 처벌을 받았고 끈질긴 항고와 유전자 검사 끝에 88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살인 누명을 벗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 정부와 검찰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 소송을 거부했는데 "그들(정부)은 내 삶을 보상할 수 없다...나는 수감 기간 1년당 2억 달러를 원한다. 아니 하루당 2억 달러를 원한다..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의 값어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얼마나 헐한 존재로 생각하는지 이미 지겹게 봐왔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얘기했지요.
이 얼마나 대단한 자존심입니까? 자신의 행복이 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겠다는, 자기의 불행에 대해 남 탓하거나 남에게 불평하지 않겠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존심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는 사람의 행복이 사람은 물론 주님이 아닌 다른 신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고 하고, 더 나아가서 불행도 다른 신 때문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빛과 함께 어둠도 주님께서 주시고, 건강과 함께 병도 주님께서 주시고, 생명과 함께 죽음도 주님께서 주시고, 행복과 함께 불행도 주님께서 주시니 주님 아닌 다른 신에게서 구원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라고 권고하는데 땅끝의 우리도 이 구원에 초대받는 대림절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 자주 질문하는 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오늘 복음도 역시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 두 명을 불러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고 있었고 세례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시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인정하시는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을 예수님께 직접 보내어 그분께 질문하고 직접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 안 하기로 유명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특별히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질문하라고 했지만,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 동양인 기자가 일어나 아시아를 대표해서 자신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중국 기자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 한국 기자들의 시간이니 앉으라고 했지만, 그 기자는 한국 기자들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기회를 넘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자 결국엔 중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교수님이 첫 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선배가 아주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괜찮아. 학생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조언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그저 말하고 학생들은 받아적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란 교수의 말은 “수업 끝났으니 가방 싸세요”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저도 외국에 나가 수업을 듣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겸손해서일까요?
질문할 필요가 없는 교만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을 다 알려주고 세상으로 나가면 남이 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질문할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질문은 누군가 믿는 사람에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거짓말쟁이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지 타인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이기고 구원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영화 ‘페르마의 밀실’(2007)입니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네 명의 수학자가 위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대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제한 시간인 1분 이내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사방이 오그라드는 밀실뿐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뿐이지만 아무리 천재들이라 해도 역부족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명 중 한 명이 이 장치를 만들어 꾸민 짓이었습니다. 35년 동안 어떤 가설을 증명하려 했는데 증명 10일 전에 그 기회를 젊은 수학자에게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젊은 수학자는 골드바흐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관심을 끌려고 풀었다고 한 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일인자가 되지 않는 이상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이런 일을 벌인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 분노로 기절시켜버립니다. 방은 점점 줄어들어 시간은 없는데 유일하게 나갈 방법을 안 사람을 기절시킨 것입니다.
그 방을 만든 사람이 그 방과 함께 죽기를 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 이 고생을 시키고 있다며 유일한 탈출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묻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해결해보겠다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기절시킵니다. 하지만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가 주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자녀들이 하느님께 질문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는 자신보다 아는 게 없다고 여기게 되고 하느님께 물을 줄 모르게 되면 이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자기 자신이 내린 해답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나에게 묻고 내가 내린 답대로 하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고 부모에게 이것저것 다 물어볼 때 아이는 행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위에 내리는 구름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성막도 이동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막은 감사의 봉헌으로 내 안에 만들어진 주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는데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에 나를 맡길 때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뜻이 일치하면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와 누구에게 질문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참다운 스승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누구에게 질문해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는 스승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커져 온전히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믿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요, 부모가 됩니다.
하느님께도 질문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만 믿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예수님께 질문을 던져야 교만에서 벗어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 믿음과 깨달음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자주 예수님께 질문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느 자매의 사연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 자매가 한밤중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끙끙댔지요. 어머니를 깨워 병원에 갈까 했지만, 이렇게 끙끙대도 나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피곤하신 것 같아서 혼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음 날 저녁, 어머니에게 어젯밤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딸은 기가 막혀서, “알고 있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엄마가 새벽 일찍, 일 나가야 하잖아.”
딸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잘못된 모습만 계속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사실 완벽한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완벽함만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고 힘들어지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예언자적 생활과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함으로써 예수님보다도 먼저 많은 제자가 따랐고 그 세력도 꽤 컸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요한을 위험인물로 여겨 체포한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영성 생활을 했고, 그의 말은 자뭇 준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중심의 말씀으로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활은 일상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리고 금기의 집에도 드나들었습니다. 이 모습에 세례자 요한은 혼란을 겪었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서는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당신이 누구신지 신분을 밝혀 달라고 질문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틀에만 갇혀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뵐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영약,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배려다.
- 메난드로스 (Menandros)
중요한 것.
학창 시절에 담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 청소를 깨끗하게 하도록 했던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화장실과 요즘의 화장실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임이 분명합니다.
당시는 주로 재래식 화장실이었지요. 야외 건물에 듬성듬성 칸막이해놓고 직사각형 구멍만 뚫려 있었습니다. 밑에는 구더기가 꿈틀대고 무엇보다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대단했습니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은 완전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냄새난다고 또 지저분하다고 화장실에 안 갔을까요? 오히려 웃으면서 친구들과 화장실에 갔었습니다. 생리적인 문제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보다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일도 많고 그래서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받아들이면서 더 중요한 것을 실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수적인 것들을 우위에 두면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이 중요한 것을 사랑 실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루카 7,22)
기다림의 정점에 있는 만남이다. 그 만남으로 시달리며 아파한 우리의 시간들이 다시 뜨거워지며 되살아난다. 간절함의 막바지에는 언제나 새로운 삶이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만든 복음의 시작 성탄이다.
복음은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일깨워준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철이 드는 깨달음의 여정이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진정 찾게된다. 가난함과 진실함에서 만나게되는 기다림의 참된 고백이다.
고백의 계절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구구절절 만난다. 가난하기에 복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어떤 사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는지를 아프게 반성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엄청난 이 사실과 아픈 이들이 제대로 걷고 제대로 보고 다시 깨끗해지고 되살아나는 행복의 이야기를 이제 우리가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 주님의 행복이다. 우리의 간절함으로 주님의 탄생은 뜨거운 심장이 된다. 새로운 고백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행복의 노래로 삶은 더이상 메마르지 않다. 심정(心情)과 심장(心臟) 사이의 고백이며 그 고백이 복음을 믿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살아있는 복음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12월 1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8 |
---|---|
21년 12월 1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7 |
21년 12월 1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6 |
21년 12월 14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4 |
21년 12월 1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3 |
21년 12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2 |
21년 12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