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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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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12월 1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아들들을 불러, 유다에게서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신약 성경의 첫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메시아이심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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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49장 1-2절, 8-10절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그 무렵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 와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목을 잡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 그가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장 1-17절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천상 양식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늘 이 양식을 바라며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7일 (금)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우리 인생의 여정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께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사용합니다. 이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치 나무가 뿌리에서부터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예수님의 오심이 준비되었고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다윗, 다윗에서 여호야킨, 여호야킨에서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직계 중심으로 나열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종족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짐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선조가 반유목 상태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임금이기에, 예수님께서 임금인 다윗과 혈통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이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족보에는 타마르,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 등 4명의 이방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밝힙니다. 나아가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선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인생의 여정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도 뵈올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앞으로 남은 한주일에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성탄을 한 주일 앞둔 오늘 우리 전례는 예수님 족보 얘기를 듣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족보 얘기를 들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들 애기를 듣기 위해서인데 가까이서 준비한 사람들 얘기를 듣기에 앞서 더 먼저부터 준비한 조상 얘기를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를 조상들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오도록 준비하자'라고 하며 그 오래전부터 모든 조상이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했을까요? 

전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족보에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은 준비했을까요? 

그들이 비록 자기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고, 자기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며, 자기 왕국을 이어갈 위대한 왕이 나올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어 알고 또 믿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요. 

이렇게 족보의 중요 등장 인물들도 주님 탄생을 준비한 분들이 아니니 하느님께서 싫어하실 일만 골라서 한 다른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들은 조상이기는 해도 탄생을 알고 준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들 조상들이 왕족의 혈통과 족보를 주님께 대물림했더라도 신족의 혈통과 족보를 대물림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탄생을 준비한 것은 누구란 말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오랫동안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며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시지 우리 인간이 그 길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적인 혈통과 족보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탄생에 족보의 조상들이 한 것은 무엇이고, 그리스도 탄생을 위해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까? 

주님의 탄생을 위해 우리가 할 것은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안에 탄생하시도록 할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길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양간의 말 구유처럼 우리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성모 마리아처럼 동정녀의 태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 않은 것이네요. 앞으로 남은 한주일 이것이 가능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과거의 모든 기억을 감사의 역사로 바꿔야 하는 이유 ; 현재의 감사를 알아보기 위해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이렇게 결론맺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6-17)

루카 복음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처럼 정확히 십사 대씩 자르지는 않습니다. 족보를 십사 대씩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이 들어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속 인류구원을 위해 역사 속에서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과정은 분명 죄와 벌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나 결과는 ‘그리스도’라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과거가 온통 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현재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웨이 프롬 허’(2006)는 ‘기억이 사라지만 사랑도 사라질까?’라는 질문은 던지는 영화입니다. 그랜트와 피오나는 결혼한 지 44년이 된 행복한 노부부입니다. 그러나 피오나가 치매에 걸려 프라이팬을 냉장고에 넣고 글 읽는 법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편의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한 피오나는 스스로 요양원에 머물기를 고집합니다. 그랜트는 차마 아내를 떠나보낼 수 없어 주저하지만, 급기야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요양원에 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요양원 적응 법규상 한 달은 누구의 면회나 전화 통화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달 뒤 피오나를 만난다는 설렘에 요양원을 방문하지만, 피오나는 왠지 그랜트를 대하는 것이 시큰둥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편을 잊은 채 오브리라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랜트는 매일 방문하여 피오나에게 자신이 남편임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주는 오브리에게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인 것을 잊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오브리의 어떤 면이 좋냐는 그랜트의 질문에 피오나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요. 전혀.”

 그랜트와 마찬가지로 오브리의 아내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오브리와 피오나는 부둥켜안고 슬퍼합니다. 피오나는 그랜트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달라고 합니다. 집은 요양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급격히 쇠약해져 갑니다. 그랜트는 아내의 슬픔을 덜어주려 다시 오브리를 데려오려 고군분투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랜트가 오브리를 그녀 앞으로 데려오는 순간, 피오나의 기억 하나가 깜빡이며 남편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날 버릴 수도 있었는데,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사실 이 장면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피오나에게 정말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그동안 그냥 오브리가 좋아서 그랜트와의 기억을 잊은 것처럼 연기한 것인지.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오브리가 아니라 그랜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은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하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도 다시 육정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기억이 없어도 김희아 씨처럼 모든 기억을 감사한 하느님 섭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작업도 묵상기도에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기억을 감사로 바꾸지 않으면 현재를 살 수 없습니다. 과거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현재에 머무시는데 항상 과거에만 머물면 주님을 만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도 영화 ‘가지니’(2008)는 한 남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애인이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도 머리에 크게 다친 산제이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산제이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15분 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집니다. 다만 복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에 새겨넣어 잊지 않으려 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이름과 어떤 사람인지를 적어놓습니다. 

현재를 포기하고 자꾸 과거에만 머물려 하는 산제이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그 큰 상처들을 어떻게 감사로 바꿀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과거가 모두 감사가 되지 않으면 자신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항상 지금-여기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나를 과거에 묶어놓은 기억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감사로 바꾸는 작업부터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에 분명 세상눈으로 안 좋은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제가 지금 사제생활을 하는데 큰 재산이 됩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마지막 피정을 할 때였습니다. 저는 피정 내내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으면 표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일주일 넘게 그런 표징을 바랐지만, 주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과거로부터 저를 부르고 계셨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날도 종일 혼자 산에서 묵상하다가 저녁 식사에 맞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앙상하게 죽은 작은 나무에 나뭇잎이 하나만 간신히 달린 모습이 보였습니다. 왜인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생각도 나며 그 밑을 지나칠 즈음에 그 마지막 잎새가 제 바로 앞으로 툭 하며 휘날리듯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뭇잎 주위로 시간과 공간이 흡수되는 듯 하며 소름 같은 것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였습니다. 

“너는 행복이란 것으로 할머니의 죽음 때부터 너를 부른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네가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런 청을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 앞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게 함으로써 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너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바로 네가 지나갈 이 자리에, 그리고 이 시간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도록 이 나무가 심어지고 그 잎에 떨어지도록 한 것이다.”

말로는 설명해도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저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믿었고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그런 사건 속에서도 내가 침묵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방향을 헛갈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기억들을 감사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현재에 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기억을 감사와 찬미로 바꾸고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만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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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매년 총고해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 신부님이 오셔서 신학생들의 고해를 들어주셨지요. 끝기도가 끝나고 성찰을 한 뒤에 저 역시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고해소로 향했습니다. 고해소마다 신학생들의 줄이 길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해소는 어떤 신학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됐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곧바로 왜 신학생들이 이 고해소에 들어오지 않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한참을 혼났습니다. 고해를 하자, 제대로 성찰하지 않았다면서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들은 이 신부님이 고해소에서 어떻게 성사 주시는지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고해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매우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미움의 감정이 잘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저 역시 신부가 되면서 오히려 이 신부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고해소에서 화를 내지 않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지를 기도하면서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는 미사 전에 1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줍니다. 미워하고 원망했던 그 신부님이 오히려 저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로 시작하는 ‘족보’는 우리 방식으로 번역된 말이고, 본뜻은 출생 내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내력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은 구세주 메시야의 대명사적 호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구약성경 사상이고 예수님은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 전체의 운명을 한 몸에 책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느님의 약속은 견디기 어려운 기나긴 밤이 지나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족보 속에는 이방인 또는 죄인으로 이름난 여인 넷이 끼어 있습니다(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예수님께서는 완전무결한 혈통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죄와 이방인의 피를 받아 태어나셨습니다. 죄인을 구하러 오시기 위해 똑같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들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족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힘과 자신감을 찾아 항상 바깥으로 눈을 돌렸지만, 자신감은 내면에서 나온다. 자신감은 항상 그곳에 있다.

-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칭기즈칸의 편지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먹을 게 없던 시절,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아는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는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차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 칭기즈칸의 편지 -

 


자신이 되려는 그 무엇은 그저 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하나하나 이겨냈을 때 얻는 훈장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남탓, 운 없음을 탓하기보다는 성실하지 못해 변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 1,1)

 

시작과 완성 사이에 우리가 있다. 족보의 마디마디를 거슬러 올라가면 뜨겁게 만나게되는 한 처음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재창조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숨결 모든 사랑에는 가장 좋은 은총의 사연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고 변화였어도 바뀌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묻게된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에게서 멀리있지 않다. 하느님의 빛이 사람의 마을로 내려오신다. 때가 무르익듯 때맞춰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탄생하신다. 

하느님의 구원은 때를 놓치신 적이 없다. 이와같이 사랑의 역사는 강생과 육화로 멈춤이 없이 사랑으로 흐르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잡아야 할 삶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우리들 삶이 된다.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시간이란 없다. 아파하며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의 탄생으로 모든 시간과 모든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닌 가장 알맞은 은총이 된다. 저의 과거 저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시작과 완성을 이어주는 예수님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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