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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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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3주간 목요일 -

 

 

2021년 12월 16일 (목)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시어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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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4장 1-10절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은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환성을 올려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즐거워하여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아들들이 혼인한 여인의 아들들보다 많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의 천막 터를 넓혀라. 네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쳐라. 네 천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네가 좌우로 퍼져 나가고 네 후손들이 뭇 나라를 차지하여 황폐한 성읍들에 자리 잡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수치스러워하지 마라. 네가 창피를 당하지 않으리라. 네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을 잊고 네 과부 시절의 치욕을 네가 다시는 회상하지 않으리라.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 그분께서는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나에게 노아의 때와 같다. 노아의 물이 다시는 땅에 범람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맹세하였듯이 너에게 분노를 터뜨리지도 너를 꾸짖지도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다. 

10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7장 24-30절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는 사자다.

 

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26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29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30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민수 베드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6일 (목)
김민수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어떨까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자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여졌고,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길을 닦아 놓는 사람이며, 옛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면서 메시아의 구원 시대를 알리는 사명을 이행하는 큰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새 시대가, 구원을 약속하는 데 그친 옛 시대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시대에는 가장 작은 이일지라도, 약속의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기에, 많은 백성과 세리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서 의로운 분이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가졌던 마음을 상기해 보고,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하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윤리적 문제나 감정의 혼돈뿐 아니라, 그 뿌리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감정의 혼돈이 어디에서 오는지 깊이 있게 볼 수 있도록,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어떨까요? 

내게 일어난 일들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다 보면,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고 더 가지고 싶어 움직인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펼쳐 놓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감히 주님의 아내가 되는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지금까지 지나쳐 읽던 구절이 오늘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남편이라는 것, 이스라엘이 한 때 소박맞았지만 본래 주님의 아내였고 그래서 이제 다시 부르실 거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우리도 감히 주님의 아내라는 생각, 주님의 아내로서 주님의 자녀들을 많이 낳을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우선 우리도 주님의 아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 있지만 다른 잡놈의 아내가 아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노예는 하느님의 자녀를 낳을 수 없고, 다른 잡놈의 아내여도 하느님의 자녀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때 다른 잡놈과 놀아나다가 주님으로부터 소박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다시 당신 아내로 부르시겠다고 하시니 다시 신분 회복이 되면 우리는 이제 주님의 자녀를 낳는 아내, 왕성하게 임신과 출산을 하는 아내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내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는 부르심을 이 대림절에 받고 성탄 때는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을 낳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를 받은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항구보다 먼저 등대를 찾아야 하는 이유 : 예수님보다 먼저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시어 사람들이 그분께로 오는 길을 닦게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침묵’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침묵’이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침묵시키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노력하면 침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는 김상운 씨가 방송일을 할 때 실제 접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우리에게 한없이 떠들며 두려움을 주는데도 그 목소리를 잠재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뱀에게 계속 물립니다. 뱀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아의 목소리를 끊으려고 노력하면 끊어질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새들이 사라져 봄이 되었는데도 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인 제목입니다.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최근 50년간 북미에서만 새들이 32억 마리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인간 때문인데, 인간으로 인한 온난화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먹이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충제로 새들의 먹이인 곤충을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뿌린 살충제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귀찮은 벌레들을 죽이기 위해 쓴 살충제는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줄 알았지만 결국 피해는 인간 자신이 본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곤충들이 있습니다. 그 곤충들을 내 힘으로 죽이면 괴롭힘도 없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죽습니다. 사실 나는 자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평온했을 때가 있습니다. 아빠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가 정착할 항구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항구가 있는 배는 바다에서도 고요합니다. 

그러나 표류하는 배라면 생존을 위해 매우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항구 없는 배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영원한 항구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죽음 뒤는 책임져줄 수 없는 불완전한 간이역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저를 침묵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 잡념이 사라져서 잠도 잘 오고 다음 날도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자신을 보며 주님께서 더 울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 부모까지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항구를 알려주는 등대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희아 씨에게는 구세군 보육원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한 수녀님이 유학 와서 첫 해를 공부하고 너무 힘들어 되돌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알프스의 산자락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에델바이스’를 보게 해 주시면 한 해 더 해보고 아니면 돌아오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알프스를 걸으며 에델바이스만 찾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떠나기 전날 밤에 다음 날 출발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인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녀님, 저기 봐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수녀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알프스산 꼭대기에 둥그렇게 구름이 걷혀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아, 에델바이스가 알프스의 별이란 뜻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부부터 시작하여 석사까지 모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요해질 수 없습니다. 수녀님이 알프스로 가서 산행할 때 침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로 초대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스케일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광야로 불러내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까지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항구를 찾지 못한 배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항구로 이끌어 참 평화를 줍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나 항구에 머무는 사람은 또 누군가의 등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등대를 통해 항구를 발견하면 ‘감사’로 그 항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기도 중에 너무 많은 분심으로 힘들다는 사람을 자주 만납니다. 그때 제가 주로 하는 조언은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분심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십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찾아보십시오.”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주님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분심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네가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면서 의지가 없어서 우울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정신의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보려는 노력이 자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어둠 속에만 머물려는 유혹은 생각보다 큽니다. 그 유혹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주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주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실행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그들보다 훌륭하며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영광은 복음에 따라 사는 이들의 영광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드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을 예언자로, 예언자보다 위에 있는 인물로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율법에 따른 의로움에서 그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이며,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온갖 축복과 선물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나누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믿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의지를 세워서 보려고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도 커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꿈은 꿈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고, 고통은 꿈을 이루기까지의 자신감과 지식이 된다.

- 소리마치 타카시

 

 

구상 시인의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 구상 -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내 환경이, 조건이 모두 엉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이 나를 피하지 않고 다가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앉은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 지금의 힘듦을 스스로 극복해낼 때 보이는 나의 자리였습니다. 
 
나의 자리인 꽃자리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루카 7,27)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 길을 닦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란 생각하며 잊지 않는 마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기도로 길을 닦는 사람이 있기에 사랑이 있고 길이 있는 것이다. 

정성어린 그 길로 주님께서 오신다. 사랑을 닦으며 우리는 사람의 참모습을 다시 만나게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노력하며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할는지를 깨닫게된다. 

사랑이 맑아지면 길도 맑아진다. 길을 닦는 뜨거운 자유 길을 만나는 뜨거운 기쁨이 있다. 모든 길은 하느님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니기서 나의 뜻을 내려놓는다. 뜻을 내려놓는 여정이 길을 닦는 여정이다. 

희망과 빛의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생활로 드러난다. 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닦아야 할지를 알게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사랑을 닦는 대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랑의 길 위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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