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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12월 18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 오늘 복음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요셉도 이에 순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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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예레 23장 5-8절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화답송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시리라. 그분 홀로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영광스러운 그 이름 영원히 찬미받으시리라. 그 영광 온 누리에 가득하리라.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복음
마태 1장 18-24절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이 성전에서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다가오는 구원의 대축제를 정성껏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민수 베드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8일 (토)
김민수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8일 (토)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우리는 누구의 보호자로 불림을 받았을까요?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는 공개적인 법적 행위를 하거나 파혼에 대한 사적인 문서를 작성하여 그녀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마리아의 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려 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말씀과 매우 긴밀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언제나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아마도 큰 실망에 빠졌을 것이고, 크게 분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외적인 법의 준수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해결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요셉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 있는 존재다. 인간의 근본적인 첫 관계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다른 어떤 관계도 좋을 수 없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68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한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보호자가 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세심히 보살핍니다.
우리는 누구의 보호자로 불림을 받았을까요? 나에게 맡겨진 사람을 더 세심히 보살피려면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내 멋대로가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를 보호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또 하나의 요셉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인과(因果), 곧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흔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것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잘해서 그 일이 생겼고, 내가 잘한 것이 없을 때에는 다른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나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라거나 나의 탓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조상 탓이나 남 탓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생각지 않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의 대표가 바로 불교의 연기론으로서 인과응보, 자업자득, 업보와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온 거지요.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도 나든 너든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가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마음 안에 이미 결과가 있다는 유심연기론(唯心緣起論)까지 있지요.
예를 들어 마음보를 곱게 써야 좋은 일이 생긴다거나 복이 온다고 하지요. 인간이 마음만 먹었어도 그 안에 선 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선 또는 악의 결과가 열매를 맺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차이인 겁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기에 하느님 없이 모든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인과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일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믿고,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와의 전쟁에서 져 포로가 되고, 감옥 생활 후 1년을 중병을 앓다가 살아난 뒤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젊은 나이에 전쟁과 포로 생활과 병상 생활이라는 큰일을 내리 겪으면서도 이 일들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또 전쟁터로 간 겁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뜻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지요.
결국, 환시를 보고서야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이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의 뜻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지 못한 채 마리아와 약혼을 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을 알지 못한 채 인간적인 이유로 그리고 자기 계획에 따라 약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모른 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합니다.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고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거나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성공이나 실패이겠지만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면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다만 하느님의 뜻일 뿐입니다.
내게 벌어지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보며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요셉이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리기도와 관상기도 사이에서의 묵상기도의 역할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며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임마누엘’과 연결합니다 (이사 7,14 참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함께 계셔주심을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바꾸려 한다면 나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칫 이것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키프로스의 조각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의 문란한 모습을 보고 여인과의 사랑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순결한 여성을 만들기를 원했고 상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로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면을 갖춘 여인이라 믿으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키스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으며 비싼 옷과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아내라 불렀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위한 축제의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아프로디테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상아로 만든 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키스하자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훗날 파포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사랑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조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랑 이야기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인간이 된 갈라테이아가 자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혼자 남겨두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계속 눈앞에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잠시 떠나있으며 인간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한계는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육체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감독이 여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제프 폰 스턴버그’ 감독과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관계입니다.
스턴버그 감독은 당시 무명 배우였던 디트리히를 과감하게 ‘푸른 천사’의 롤라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디트리히를 완벽히 스타로 재탄생시킵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를 할리우드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시킵니다.
우선 몸무게를 13kg이나 빼게 했고 이를 뽑아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눈썹을 잡아당겨 높게 하고 코에 명암을 주어 콧방울이 좁아 보이도록 했으며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도 손수 골라서 입혔습니다. 스턴버그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디트리히의 얼굴만 있으면 숨 막히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오래갔을까요? 그나마 오래갔습니다. 둘은 8년을 연애했습니다. 문제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스턴버그의 소유욕과 집착이 둘의 관계를 파경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훗날 디트리히는 “그는 나를 자기의 갈라테이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버그는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감독으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닉 부이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깊이 생각하며 내린 결정은 나중에 거의 바뀔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묵상하여 주님을 자의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이 더 증가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감소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일찍 그 관계를 접는 게 낫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참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버는 사람과 만 원을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백만 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의 행복을 얻는 사람과 한 푼도 쓰지 않고서 한 달 이상의 행복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영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 연구가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감사의 인사하기,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불필요한 소비재 사지 않기, 친절 베풀기, 밝게 웃어주기 등등….
돈 들이지 않고 행복할 방법이 참 많습니다. 소위 ‘명품’이란 이름이 붙은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명품’이 될 때, 행복도 오래 지속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오지요. 하지만 그의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서 마리아가 곤욕을 보는 역경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22)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간음한 여자’로 신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명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에 기초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만남이다.
- 한스 카로사
기다림
보석감정사가 되기를 원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보석의 달인을 찾아가 비법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보석감정사는 거절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진득함과 끈기가 없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은 다르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보석감정사는 한 번 기회를 주겠다며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잡아 주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온종일 다이아몬드만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렇게 일주일 동안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묻습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곧 배우게 될 거야.”
열흘째, 청년은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으면 집어 던지고 포기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석감정사는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화가 나서 다이아몬드를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어제까지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잖아요.”
보석감정사는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군!”
기다림의 중요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확실한 결과를 위한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태 1,21)
내려놓은 적 하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오고 있다. 맞아들임과 받아들임 사이에 우리가 있다. 내려놓음과 함께함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함께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열리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의 참된 중심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제 색깔을 찾게된다.
탄생은 제 색깔을 찾는 기쁨이다. 사랑은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이다. 누군가의 받아들임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다. 받아들임은 감사이며 기도이다.
말씀은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성 요셉의 받아들임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여정이다. 내려놓기에 우리가 되고 받아들이기에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기에 보이는 성탄의 신비이다. 우리의 색깔도 내려놓기에 활짝 열리는 꽃이 된다.
내려놓음과 받아들임이 사라지면 성탄도 없다. 내려놓음이 성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된다. 자신을 뜻을 내려놓는 성 요셉의 눈물에서 아래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탄생이 있다. 내려놓는 말씀이 받아들임의 탄생 말씀의 사람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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