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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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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4주일 -

 

 

2021년 12월 19일 (일) 대림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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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미카 5장 1-4ㄱ절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저희를 살려 주소서.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10장 5-10절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장 39-45절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도 마리아처럼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성탄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도와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전경표 아브라함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9일 (일)
전경표 아브라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말씀의 빛은 언제나 갇혀 있지 않습니다.

 

천사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동정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합니다(루카 1,26-38 참조). 

그 응답으로 마리아가 날마다 겪어야 하는 죽음의 위험과 오해의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며칠 밤낮을 걸어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밤길을 걷는 동안은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낮에는 빛이 있어 설렘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설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만남에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응답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1,48).

혼자 견디는 시간이 고독할수록 만나는 시간의 친밀감은 더 커집니다. 어떤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만남은 고요함 속에서 그분의 소리가 내 마음에 울릴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오래도록 함께하는 시간은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존재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환한 빛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솟아오른 빛은 다른 빛을 찾아 나서고, 또한 그 빛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태중에 있는 말씀의 빛을 알아보고 그 빛 속에서 기뻐합니다. 말씀의 빛은 언제나 갇혀 있지 않습니다. 친구에게로,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노래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토록 기뻐하며 다가올 다른 세상을 노래합니다. 말씀의 길은 내 안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뜻이 아닐 때 하느님 뜻이라고 믿는

 

대림 제4주일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두 분은 친척간인데 하나는 늙은이이고 하나는 아가씨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애를 낳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애를 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상봉을 상상하면 저는 웃음이 나옵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뒤늦게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었고 마리아가 찾아올 때는 배가 제법 불러와 배를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많이 부끄러웠거나 적어도 겸연쩍었을 것입니다.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이지 애를 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가 며느리와 같이 애를 낳았는데 그때 시어머니는 너무 부끄러워 애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며느리가 도련님 젖까지 먹이곤 하였지요. 

저의 누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저의 누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나 임신했어. 어떻게 하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그래 신부한테 물으면 애 떼라고 얘기하겠어?"하고 저는 매몰차게 잘라 말하였습니다. 

저의 누나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 할머니 같은 엄마를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 때문에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고 부모가 일찍 죽어 아이가 고아가 되면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이 아이가 임신된 것을 보면 하느님의 뜻이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누나의 실수인 것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누나의 실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야. 그러니 태어날 아기는 누나의 아이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이야. 하느님의 아이를 누나가 어찌하면 안 되지. 하느님의 아이니까 이제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거야." 

이렇게 얘기하고는 제가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은 세속명도 요한이고 세례명도 요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때 우리는 뭐가 잘못돼서, 또는 내가 무엇을 잘못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하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임신을 한 분들이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의 임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에 의한 임신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모송을 기쁨에 넘쳐 부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성모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성모 마리아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분이고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싫고 두렵지만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도전하다 그 실패에 좌절하고 맙니다. 자아는 도전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하려고 항상 지금 불만족스럽게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지칩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도가 안 나간다.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등의 생각이 든다면 삶이 지쳤다는 증거입니다. 왜 지칠까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쉬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적당히 일하고 쉬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인 그레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그는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레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조정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축적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도, 지성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기억도, 연인과 헤어졌다는 기억도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자아는 불만족의 감정을 주고 믿음은 감사와 기쁨의 기분을 줍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강릉 방송국의 PD이자 DJ로 일하는 은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항상 라면을 먹는데 이는 둘의 사랑이 라면처럼 금방 끓고 라면처럼 금방 불어버리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은수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이고 상우는 진지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지 은수는 차갑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상우는 분노합니다. 홧김에 은수가 산 새 채를 긁어버리는 유치한 행동도 합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상우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그리 매몰될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때 은수는 다시 상우가 생각이 납니다. 상우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화분을 들고 상우를 만납니다.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도 모르는 은수와 다시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화분을 다시 돌려주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소리를 모읍니다. 그 소리 하나에도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에서 영원히 외로울 사람은 은수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여인이고, 상우는 이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 있는 자연의 소리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맑은 공기에 감사합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다는 말은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에 감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믿으신 분”이 되신 이유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믿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을 행복지수에 관여하지 않으면 부탄이란 작은 나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나타냅니다. 부탄 4대 국왕인 지미 싱게 왕축은 “국문총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729년에 만들어진 부탄 왕국의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지수(GNH)라는 부설을 따로 개설하여 부탄에서 행하는 모든 정책에 실제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탄이 말하는 GNH 행복지수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도, 생태학적 다양성 및 회복력, 생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부탄은 400년 전인 15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도로는 전혀 없었고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국가에 의사가 단 2명밖에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38세, 개인당 국민소득은 51달러로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탄은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한 이후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가 못 되는 최빈국 수준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제공하며 현재 국민 기대수명은 69세입니다. 

물론 현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알게 되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리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여 청년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외국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세계의 유일한 부탄도 이제 돈이 행복이라는 세상 물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탄처럼 행복을 위한 정책을 지금 바로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펴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도전하다 보면 실패를 거치며 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지만, 주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실패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나를 조종합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믿는 시간이고 분명히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로 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의 종살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 안창호

 

 

공평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불공평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 공격으로 자그마치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희생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똑같이 보상금이 주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보상금은 25만 불부터 최대 700만 불까지 액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죽음의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이, 경력, 교육 수준, 직군, 인종 등으로 그 차이가 생겼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CEO의 죽음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행려자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다르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불공평을 만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세상에 만연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하얀 눈꽃송이 피어난 사랑의 새아침이다.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사랑이 있다. 삶의 전부가 되시는 사랑이 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림이다. 

마리아는 여인에서 어머니로 탄생한다. 어머니의 탄생은 자식을 향한 최우선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삶의 탄생이다. 언제나 기쁜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자식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전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또 다시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세월을 통하여 어머니를 빚어 만드셨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삶은 기쁨이 된다. 그 사랑을 본받는 행복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시는 말씀 그리고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말씀을 믿는 사랑의 대화로 익어간다. 말씀을 믿는 그 가운데에 어머니가 있고 탄생이 있다. 

탄생!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시작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 탄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랑이 되신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있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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