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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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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3주일 -

 

 

2021년 12월 12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예루살렘을 새롭게 해 주시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라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세례자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며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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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스바 3장 14-18ㄱ절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필리 4장 4-7절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3장 10-18절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용철 바오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2일 (일) 자선주일
조용철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2일 (일) 자선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6항).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전합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오십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쁨의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필리 4,5 참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는 더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실수록,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내주십니다. 당신을 벗어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당신의 사랑과 현존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쁨은,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합니다. 곧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이에게 다가가 그를 기쁘게 해 줍니다. 자신을 내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이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 그래서 독서들에 기쁨과 관련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 자연스레 기쁨에 대한 성찰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진정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성찰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요즘 그리고 갈수록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의미보다 재미를 더 추구하고 그래서 재미없으면 아무리 의미 있는 영화도 보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요즘 타령' 할 것 없이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기쁨보다 즐거움을을 더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인간을 애기할 때 Homo Ludens/놀이의 인간이라고도 하지요. 

당연한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둘 다 만족감이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붙여서 쓰곤 하는데, 그런데 만족감이란 면에서 같지만 시차적 만족감인 기쁨에 비해 즐거움은 행위 동시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동시에 만족감이 오고 그래서 즐겁지만 대학 합격과 취업과 같은 기쁨과 바라고 바라던 집을 살 때의 기쁨은 최소 3년의 공부와 10년, 20년 주택 청약 적금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기쁨은 시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지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이 고통이고, 즐기고 싶은데 즐기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것이 고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즐거움, 곧 우리가 흔히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당장은 즐겁지만 즐거움 뒤에 허무가 온다던지 실패나 좌절이 오지요. 신나게 놀고 즐기다 대학에 떨어지고 심지어 인생이 실패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보다 기쁨을 추구하는 편이 낫는데 기쁨 중에서도 성취적인 기쁨보다는 인격적인 기쁨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취적 기쁨이란 일이 내 뜻대로 잘 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 곧 보람이고 인격적 기쁨이란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인데 오늘 독서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기쁨 곧 신앙인의 기쁨은 이 기쁨 중에서도 오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기쁨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쁨, 특히 대림절의 기쁨은 임박(臨迫)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며 그리고 마침내 오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며 오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사는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실천을 하는데 곧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자선의 실천입니다. 복음 선포와 자선의 실천이 우리의 영적 기쁨과 즐거움의 결과라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친다면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워져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자선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오늘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가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과거에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했었는데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은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가 모래사장 위에서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우연히 보고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하지만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정말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은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의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이 나오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스승 능력의 두 배를 청합니다.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두 배를 청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엘리야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주는 엘리사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두 배의 영을 주님께 청하여 제자에게 줍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할 때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바로 당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청해야 그분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당신께서 하신 일의 두 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청해도 달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 길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해 달라는 그 믿음입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공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운이 좋았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그런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힘으로는 성공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을 바꿔준 상황과 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자기 모습에서 그런 상황과 은인을 부른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은인이 다가가려고 하고, 또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찾아갈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운이 없어요.” 
 
긍정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곁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빨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군인들은 자기들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도 생활이나 영웅적인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옳은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역시 정당한 세금만 받는 생활개선을 하라고 합니다. 군사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온 군사는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역시 회개해서 생활개선만 하면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 사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장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

- 제임스 오펜하임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 전하기

 

두 가족이 낚시를 갔습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 모두 낚시를 좋아하지만, 자녀들은 모두 처음 낚시를 하는 것이었지요. 첫째 가족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앉혀 놓고 기초를 제대로 알아야 낚시를 잘 할 수 있다면서 낚시 수업을 합니다. 낚시대 잡는 법, 미끼 끼는 법, 잡은 물고기를 건지는 법 등을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가족의 아버지는 이론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낚시의 설렘, 짜릿한 손맛, 물고기를 건지는 순간의 희열 그리고 직접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먹는 맛까지 실감 나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족의 자녀가 더 낚시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론보다 실전의 감정을 느꼈던 두 번째 가족이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론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맛을 들였을 때가 먼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못 해서 이론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해야 합니까? (루카 3,10)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낸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시는 길을 낸다. 광야의 외침은 죄를 씻어주는 세례의 길이 된다. 길을 가르쳐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길은 소식인데 소식을 끝내 듣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이다. 듣지 않으면 영혼 없는 시간만이 밀려오고 밀려갈 뿐이다. 이 대림시기는 길을 보수하듯 경청을 보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방향을 보수(補修)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들으려는 사랑이 끝내 길을 낸다. 복음은 경청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보수 공사가 필요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모든 기쁜 소식은 끝까지 듣는 경청을 통하여 전달된다. 

경청(傾聽)이 대림이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 성탄은 제대로 듣는 들음에서 시작한다. 자선(慈善)또한 소식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도움이다. 도움도 듣지 않으면 독(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경청이며 자선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다림의 실천은 다름아닌 경청이다. 듣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경청하는 사랑의 길이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묻는 경청의 주일이다. 고집 센 자아가 작아져야 들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듣는 때가 사랑할 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기다리고 들을 수 있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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