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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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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2021년 12월 10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신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평화가 강물처럼 넘실거렸으리라고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당신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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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8장 17-19절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1장 16-19절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10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1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마음을 열고 자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지만, 유다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완고한 이 세대를 비난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혼례를 거행한 뒤 시장에 모여 춤을 추었고, 장례 뒤에는 죽음을 슬퍼하며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른들의 이러한 생활 양식을 모방하여, 어린이들은 피리를 불며 춤을 추거나 가슴을 치며 곡을 서로 주고받으며 놀았나 봅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거운 가락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다른 무리의 아이들은 함께 흥을 내고 어울려 춤을 추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울한 곡을 연주하거나 장송곡을 불러 보아도 함께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거나 곡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추지 않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종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고행자의 삶을 삽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귀 들린 자’로 취급하면서 배척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단식을 하고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것이 조작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워 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어 예수님의 상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이웃과 형제의 상처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어떤 사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안타까움의 토로입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의 대표적인 토로가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입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안타까움은 '알면 좋을 텐데’, '아는 대로 하면 좋을 텐데'하는 느낌입니다. 

알면 좋은데 모르는 것이 안타깝고, 모르면 배우면 좋을 텐데 배우려고 들지 않음이 안타깝고, 잘 되기를 바라는 그가 잘못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미워하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하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뭇소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과 사랑의 사람만이 안타까워 하고 충고도 하는 건데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할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충고해주는 그의 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껏 얘기해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 없는 사람은 분노하고 그를 포기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타깝고 그런 그가 불쌍합니다. 

그렇지만 불쌍해도 어쩔 수 없는데 이 '어쩔 수 없음'이 또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 말도 듣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어린애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어린애는 물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아니지요. 아주 미성숙하기만 한 아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고 떼만 쓰는 아이이며 지혜로운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로 오늘 당신 말씀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그러니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식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도 배우고 같이 먹고 마시는 주님에게서도 배우겠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입니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해지려면 지혜로운 자를 사랑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통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삼구(세속-육신-마귀)를 벗어던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지혜’가 아니면 사랑의 실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이 지혜를 전하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실로 거칠고 힘들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교만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들은 여러 핑계로 세례자 요한의 지혜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합리화를 이렇게 합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지혜, 곧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세대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삼구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거쳐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문에 변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변화된 사람과 머무를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분이 물 위를 걸으면 시도할 용기가 납니다. 그 시도 안에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말로만 들어도 안 되고 인간이 아니어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행복을 사는 사람과 머물 때만 증가합니다.

지혜는 지혜로운 자와 머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십니까?”라고 물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배운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우리가 잘 알듯이 이탈리아 표준어의 시발점이 된 『신곡』(Divina commedia)을 쓴 사람입니다. 『신곡』은 단테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까지 올랐으나 정치적 격변으로 추방당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유랑하다 라벤나에서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랑생활을 하며 지은 이 책은 ‘지옥-연옥-천국’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히 지옥은 35살(당시 평균 연령이 70세) 피렌체의 최고 공직인 프리오리가 된 시점에서 ‘삼구’(三仇)로 길을 잃고 있었던 자신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입구에서 그는 세 무서운 동물을 만납니다. 표범(육욕)과, 사자(권력욕)와, 암늑대(재물욕)가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는 교리를 표현한 것이고, 자신이 그런 처지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옥을 거쳐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때, 그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이는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여인입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9살 때, 그리고 18살 때 딱 두 번 만났을 분인데도 그는 평생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9살 때 그녀를 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딸이 아닌 신의 딸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감히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18살 때 다시 한번 천사와도 같은 그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불행히도 1290년 향년 24세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만남에서는 잠깐 대화를 나눕니다. 단테도 1283년 이미 다른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고 3남 1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단 두 번의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말하기 위해 『새로운 인생』(La vita nuova; 1295)이란 책을 씁니다. 그 이후에 10년 동안 세속-육신-마귀에 빠져 지옥의 삶을 살기는 했지만,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그 여인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외로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 고상한 여인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달콤한 잠에 떨어졌다.”

자신의 아내인 ‘젬마 도나티’에 대해서는 어느 책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는 그가 단 두 번 만난 여인에게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날 그녀의 의상은 매우 고귀한 색상인 예쁜 주홍빛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게 허리띠가 달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과 결혼한 신이라 표현한 것이고 그녀를 심장에 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만큼 어떤 누군가를 심장에 받아들이면 그 누군가가 평생 그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그는 순수했던 시절, 자신의 심장 안에 들어온 그녀를 통해 다시 정화되어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테는 고귀한 사랑만이 그 사람과 함께 머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다는 지혜를 평생을 거쳐 베아트리체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세례자 요한이고 베아트리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면 그분이 심장 안에 머물며 우리를 가난으로 이끌고 이어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을 체험합니다. 먼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삶으로 말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무심할까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것과 머물게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돈이나 쾌락, 명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과 반대의 길로 이끄는 세상의 세례자 요한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인 그리스도께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사라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디에 흥미를 느끼고 있나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참 많은 놀이가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등장했던 놀이는 모두 제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뽑기 게임,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 게임 등등…. 그 밖에도 많은 게임으로 심심한 줄 몰랐습니다. 워낙 게임을 같이 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참고로 한 반에 70명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심심해할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모이지 못했을 때, 서로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았을 때는 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 할까?”라고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가 “그러면 이거 할까?”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냥 집에 가자.”라는 말에 하나둘씩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장터에서 혼례잔치 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어떤 놀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흥미를 잃은 세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도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함께 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불평불만으로 힘들다고만 말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들은 어디에 흥미를 느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이사 48,18.19) 
 
주님의 계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의로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이 모든 은총이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고 있나요? 세속적인 것에 대한 흥미가 너무 많아서 주님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와 주님 말씀을 외면하는 지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 생텍쥐페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를 커다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즉, 기술에 기반을 둔 현대문명은 모든 것과 모든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거짓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알려졌을 때, 일반적으로 앓는 독감보다도 훨씬 약한 바이러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그래서 곧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2년이 거의 지나간 지금도 불안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전능하다고 생각했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도 스스로 전능하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 (마태 11,19)

 

사랑이 없는 말들은 언제나 소란스럽고 요란하다. 하루를 사는 일이 감정을 살피는 일이 되었다. 공감도 이해도 없는 우리들 마음이다. 정말 놓치고 사는 것은 소중한 사람이다. 누가 알겠는가! 먹보요 술꾼이라 손가락질한 그가 우리를 가장 사랑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르게 살 수 있는 기쁨이 우리들 삶의 다채로운 빛깔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은 서로를 이해하는 기도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도가 없는 마음은 참으로 생동감이 없는 마음의 비극이다. 무심코 던진 우리의 말에 마음의 발길질을 당하는 인격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듯 말씀이 곧 인격이다. 사람은 그래서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존재 말씀의 존재이다. 수 많은 별칭과 호칭 가운데서도 먹보요 술꾼으로 불린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당신의 길을 가신다. 

말에 갇히지 않으시는 말씀이시다. 말씀이란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움에서 탄생한다. 먹보요 술꾼을 고치면 사람과 사람 가슴과 가슴이 된다. 그 어떤 마음도 밀어내지 않으시는 마음이시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 있어야 할 성탄이다. 

사람이란 먹보와 술꾼을 뛰어넘는 공감과 이해 존중과 사랑 기도와 말씀의 존재이다. 그 사람을 오늘 다시 보게되는 기쁨이다. 죄인들의 친구이며 따뜻한 말씀의 나눔이다. 우리의 말씀은 정녕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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