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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14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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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2021년 12월 14일 (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했습니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영혼의 어두운 밤>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시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고 예언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믿지 않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요한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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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스바 3장 1-2절, 9-13절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 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1장 28-32절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복된 요한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오묘하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이 제사로 힘을 얻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교회 안에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4일 (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14일 (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무(無)의 추구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1542년 스페인 아빌라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스물다섯 살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뒤 요한 성인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만나, 가르멜회의 개혁 운동을 함께하기로 합니다. 그는 가르멜회 본래의 엄격한 금욕, 극기와 고행, 가난한 생활을 통하여 관상적 수도 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개혁에 반대하던 동료들의 박해를 받아 수도원 독방에 감금되기도 합니다. 감옥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지만, 성인은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개혁을 시작하며 바꾼 이름인 ‘십자가의 요한’처럼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체험합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성은 ‘무(無)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전부이시고, 우리 인간은 무(無),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전부이시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무(無)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새로운 품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났으며, 동시에 인간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처럼 살고자 노력하고, 그분과 일치를 이룸으로써 천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전부이신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 되려면 자신을 벗어나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무(無)의 추구’입니다. 

빛이신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정화가 필요합니다. 어두운 밤을 통하여 우리의 온갖 욕망을 마주하고 정화하여 비워 낸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섬세하고 자상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生)의 황혼 녘에 너를 사랑으로 심판할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학자와 할머니 중에

 

오늘 주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이 저에게 하시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지요. 이 질문이 분명 저에게도 하시는 질문인데 저는 종종 그에게 또는 그들에게 하신 질문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신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기도와 신학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신학할 때의 주님은 객관자 그분이시지만 기도할 때의 주님은 상대자 당신이십니다. 

신학할 때의 주님은 제게 관념의 대상이지만 기도할 때의 주님은 제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신학할 때 배운 주님 말씀은 제게 이론이지만 기도할 때 들은 주님 말씀은 제게 실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주님의 비유를 바꿔봤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냐?" 

일생동안 신학을 공부한 사람과 일생 배워 안 것은 주님의 기도밖에 없어 그 기도만을 줄창 한 할머니가 있는데 누가 더 하느님을 사랑하고 누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겠느냐? 

단언컨대 공부한 적 없고 기도한 할머니가 기도 안 하고 공부한 신학자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천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종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동방의 별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에 대해 말씀을 이어가시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믿어서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을 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오늘 비유 말씀에서 맏이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엔 반대했지만, 나중엔 갔고 다른 아들은 처음엔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엔 가지 않았습니다. 왜 마음이 바뀐 것일까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묵상’을 한 것이고 한 사람은 그저 자아와의 대화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맏이는 그동안 아버지께서 해주신 일들에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하는 묵상 기도를 했고, 가겠다고 했던 다른 아들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말에 따를 필요가 없겠다는 불만족인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감사’뿐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격체는 ‘뜻’으로 다가오는데 뜻을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에게 고마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맙지 않으면 어떤 뜻도 따라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께 감사가 나오게 하려면 의지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나 김희아 씨의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 찾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감옥까지 가는 인생에서 감사일기를 쓰면서 인생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김희아 씨도 감사할 거리를 찾으려 해도 우리로서는 전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살려고 감사를 찾다 보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까지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밖에도 여기저기, 감사로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 사례도 허다합니다. 

감사가 없다면 예수님을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사실 매일 성체를 보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못 본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예수님께 마음으로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아무리 보려 해도 보지 못합니다.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것입니다. 

처음 예수는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이 하나도 없었소.” 

그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창녀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소.”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서로 매질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여보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 만난 사람들일까요? 만나지 못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감사가 좋은 줄 알면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유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날 하늘의 두 천사가 각각 바구니를 하나씩 가지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한 천사는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자기의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를 거두어 바구니에 담고, 또 다른 한 천사는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걷어 바구니에 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소원의 기도를 거두는 천사의 바구니에는 세상을 다 돌지 못했는데 벌써 차고 넘쳤으나 찬송과 감사의 기도는 세상을 다 돌아서도 바구니에 차지 못했다고 합니다.

감사를 나중에 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자아는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무언가를 먹게 되면, 어떤 위치에 서게 되면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서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하느님이 되지 않는 이상 불만족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쫓던 ‘별’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선악과를 감사히 바치게 만드는 일입니다. 생명 나무까지 가는 길에 감사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감사의 방법이 선악과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봉헌인 십일조의 필요성을 말하는 ‘악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가 오늘 복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은 별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늘을 보고 감사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감사는 그리스도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뇌과학자 알렉스 코브(Alex Korb)는 감사와 뇌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뇌에 인간의 감정을 담당하는 핵심부위인 전대상피질이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생각보다는 감정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그러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감사를 거치면 이후에 그것들이 기쁨과 사랑과 같은 감정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한 세무사 박점식 씨(64)는 근육위축증 장애가 있는 아들에게 자격 미달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일반 가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감사일기를 10개씩 쓰고는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자녀와의 사이도 좋아졌고 직원들도 감사일기를 쓰게 하여 회사 분위기도 좋아졌고 능률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멈추지 않고 장모님께 감사한 것 100개를 적어 선물하였습니다. 그런 선물을 받는 장모는 얼마나 기쁘고 또 그런 선물을 하는 남편을 아내는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둘을 이어주는 다리는 어쨌거나 감사밖에 없습니다. 

그는 책도 펴냈는데 어머니 살아생전에 1,000가지 감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쓰는 중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생전에는 마치지 못하고 관에 쓴 것까지만 넣어드렸는데, 99번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1,000가지 감사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거대한 사랑, 철학, 교육관, 가치관을 확인하지 못하고 영원히 묻어둘 뻔했습니다. 이것 역시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얻게 된 감사 덕분이고 행운입니다.”

사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만났을 때 진정 만난 것입니다. 그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길이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쫓는 별이 감사입니다. 그 감사를 일어나게 만드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이고 교회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감사의 봉헌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감사의 꼬리를 잡지 못하면 감사는 잡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잡으면 머리도 딸려옵니다. 그러나 머리를 잡으려면 영원히 감사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속도보다 방향이다.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잘 이용합니다. 예전처럼 지도를 펼쳐서 이 길을 맞는지 확인할 필요 없이, 편하게 운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가려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만약 상호만 알고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전혀 다른 지방의 어느 낯선 지역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를 모르면 당연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목적지는 반드시 운전하는 사람이 알아야만 합니다. 다른 이의 도움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알아야지만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삶 안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 삶의 목적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되는 대로 산다면서 아무런 목적 없이 살고 있습니다. 목적이 없으니 다른 이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빠르더라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밭에서 일할 것을 명한 아버지와 그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성경에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을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만 하고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더 낫냐고 물으십니다. 
 
처음에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반대로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유대인의 지도자들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목적지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를 모르니 지금의 세세한 것에만 집착하면서 그냥 살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순간의 만족만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요한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 나라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으며, 이를 향해 제대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떳떳해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 한근태

 

 

나의 뇌를 길들이기

 

새로운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아주 특별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워낙 게을러서 새로운 행동을 받아들이는데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 없이 보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거부하려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심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작심삼일은 우리 뇌의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게으른 뇌이지만 능력은 뛰어납니다. 이 능력은 거부 반응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포기를 하지 않네. 그냥 해야겠다.’라며 능력 발휘를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3주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좋은 습관을 익히려고 할 때, 최소한 3주만 버티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뇌가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해도 안 된다며 자신의 능력 없음을 탓합니다. 그러나 끈기 없는 자신의 나약함 의지를 먼저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마태 21,32)

 

반대 방향에도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목마름을 꿰뚫고 믿음의 모순을 꿰뚫는 주님의 말씀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세리와 창녀들을 먼저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바닥에서 피어나는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꽃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다. 소중함을 되찾아 돌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모두를 보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아픈 사람을 먼저 만나시는 하느님이시다.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위로 올라올 수 없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 않다. 믿음으로 열리는 믿음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마저 우리들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이시다. 세리와 창녀들 마저도 기다려주시는 기다림이시다. 

믿음이란 부여잡고 있는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나눔이다. 놓아버리고 내어주는 것이 믿음이다. 사람들의 믿음 안에서 길이 열린다. 믿음은 하느님의 시간이다. 저마다에게 가장 알맞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갈망(渴望)은 하느님 나라에 맞닿아 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믿음으로 다시 채워지는 믿음이다. 대림은 믿음으로 다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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