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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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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

 

 

2021년 12월 3일 (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Memorial of Saint Francis Xavier, Priest)는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했습니다. 

1537년에 사제가 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의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고,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본토가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했습니다.

1662년에 시성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흔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립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다니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야곱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다음,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시며 눈을 열어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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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29장 17-24절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9장 27-31절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프란치스코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고 복음에 충실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2월 3일 (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3일 (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1927년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 성인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삼십 일 피정을 한 뒤, 1534년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에 있는 성당에서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 회원으로 첫 서원을 합니다.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1540년 예수회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쳐 인도 고아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545년부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뉴기니와 필리핀 인접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을 하였고,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을 왕래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중국을 회두시켰더라면 일본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중국 본토가 보이는 광둥성 앞 상촨섬(上川島)에서 명나라 황제의 입국 허가를 기다리던 가운데 풍토병에 걸려, 결국 중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회 회원들이 날마다 두 차례씩 하는 ‘의식 성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의식 성찰’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회원들이 많이 바쁠 때는 기도를 관면해 주기도 하였지만, ‘의식 성찰’만큼은 절대 관면이 없었습니다. 

의식 성찰은 내 삶 전체, 내 존재 전체를 살펴보는 기도입니다. 눈을 떠서 점심시간까지 그리고 잠자기 전까지 나의 행동, 선택, 그리고 감정의 변화를 살피면서,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행동하였는지, 아니면 노예로 살았는지 살펴봅니다. 

그렇게 살펴본 뒤,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끝에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답을 찾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교만, 영적인 시각 장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태 9,27)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주님께 쫓아오며 자비를 청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자비와 관련한 성찰을 해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청원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청원 기도라고 했지만 2-30대 때는 제일 싫어하던 기도였지요. 자비를 달라는 제가 불쌍하다고, 더 나아가서 참 비참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저는 제가 불쌍한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하느님께도 그런 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교만했던 겁니다. 

그런데 교만함, 이것이 참으로 불쌍하고 제일 비참한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먼 것은 교만함에 비교하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첫째로 교만은 자기의 본모습이랄까 전모를 못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런데 참으로 모순입니다. 왜냐면 교만은 자기 밖에는 모르는 지독한 자기 집중인데 그렇게 자기를 보는데도 자기를 제대로 못 보기 때문이고, 제대로 못 보는 것은 자기의 죄와 비천함은 보기 싫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비참함과 비 구원을 모르고 자비를 청하지 않음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비참함과 비 구원을 보고 인정해야, 그리고 이 비참함과 비 구원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구원자에게 구원을 청하고 자비를 청할 텐데 인정치 않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지요. 

그렇습니다. 교만은 자기만 보고 자기 밖에는 못 보게 합니다. 그런데 자기 밖에는 못 본다는 말은 자기의 안과 밖이 있는데 자기 밖에 수많은 사람이 있고 하느님이 계셔도 못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사람의 무시(無視) 현상입니다. 한자에서 무시를 그대로 풀이하면 시력이 없다는 뜻도 되고, 우리말의 업신여김의 뜻처럼 있는 것을 없다고 보는 뜻도 됩니다. 

제 생각에 업신여김은 없이 여긴다는, 분명히 사람이 있는데도 투명 인간처럼 없이 여김의 준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요 죄이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입니다. 

이 장애는 인격적인 장애일 뿐 아니라 영적인 장애입니다. 인간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 오랫동안 눈먼 것 때문에 한껏 겸손해진 눈먼 이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 주님!"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믿었기에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능력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이 멀었어도 주님을 알아본 그들이 부럽고 눈이 멀쩡해도 주님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제가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 눈먼 이들처럼 저 또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 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 그래서 다 해주냐? 물론. 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 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 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 

남편의 위로 누나가 5명, 아래로는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아서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큰 시누이에게는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닌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인 아내도 문제입니다. 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낡은 자신의 옷들을 본인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은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쨌든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 가르쳤다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 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 

‘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 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 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나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 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 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 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2집 앨범까지 내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열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 2명이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가수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6장만 팔릴 정도였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정치적 부패에 맞서던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사는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인기를 전혀 몰랐습니다. 저조한 음반 판매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었고 가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라이브 무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신비적인 가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음반을 발매한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인기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는 엄청난 인기와 모든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 19,30) 
 
이 세상 안에서는 꼴찌의 삶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자비의 청을 목청 높이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셨는데 그 조건으로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묻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백 살 가까이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져요. 남을 위해 살았던 갓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

- 김형석

 

 

라이벌 의식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병원이지만, 입소문이 나서 계속 확장해서 꽤 큰 규모의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몇 명의 의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다행히 새로 뽑은 의사들은 모두 성실했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병원은 더 유명해졌고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원장님께 의사를 정말로 잘 뽑았다면서 새로 뽑은 의사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의사들을 하나둘씩 해고했습니다. 환자들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만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동료 의사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병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의사는 사라지고 원장에게만 아부하는 불친절한 의사만 남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원장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굳이 갖지 않아도 될 라이벌 의식으로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경쟁의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나와 함께 할 협조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마태 9,29)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나는 것이 다시 만나는 참기쁨이다. 새로운 만남을 복음으로 만들어내시는 기쁨의 하느님이시다. 만남과 떠남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고 간절하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붙들어 가두어놓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떠남이 있다. 복음을 위해 떠나는 이들이 있기에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주는 기쁜 소식이 된다. 

하비에르 선교사의 발자국이 우리를 위로한다. 생명과 바꿀 선교의 길에서 생명의 길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삶을 내어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선교는 가장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는 이국땅에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기도가 있기에 목숨을 걸 하느님이 계시고 선교가 있기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게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 기다림의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다. 기다림이 선교이고 기다림이 사랑이다. 이 위대한 선교사의 발자국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다시 배우는 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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