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3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30.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1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2021년 11월 30일 (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입니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습니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습니다(요한 1,40-42 참조).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선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에게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30일 (화)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10장 9-18절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4장 18-22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성사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복된 안드레아 사도를 본받아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다가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30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3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자신의 탐욕 마주보기

 

보좌 신부일 때 청년들과 함께 구유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함께 아이디어를 짜고 구유 안에 어떤 의미를 담을까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한 번은 구유를 가장 가난하게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가장 가난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쓰고 버린 폐기물들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버려진 물건들로 구유를 만들어 보려고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폐자재도 주워 오고, 플라스틱 페트병도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것으로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구유가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누우신 자리가 그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기다림 또한 우리 자신의 가장 쓸모없고 버려진 마음, 너무 추악해서 들추어 보고 싶지 않은 자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곳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곳을 바라보고, 거기에 자리를 마련해 두어야지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난 제자들도 그러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부에게 그물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물에 집착하였고 크고 좋은 그물을 얻고자 사람들과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였습니다. 

제배대오의 두 아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렸다고 합니다. 같은 어부였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호수로 나갈 수 있는 배를 가졌고 그런 배와 그물, 그리고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권력이었고 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분을 만나 버렸던 것은 다름 아닌 욕심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욕심, 권력과 힘에 대한 욕심이 바로 우리를 가장 추악하고 더럽게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탐욕을 마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의 자리를 비워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길손들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이고, 가장 감사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줌일 것입니다. 저의 사춘기 시기를 돌아보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의 시기를 오랫동안 보냈는데 이 방황의 시기가 제게는 군대 시기보다도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가장 기뻤던 시기도 당연히 제 인생의 목적을 찾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찾았을 때였지요. 

그래서 클라라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회고를 합니다. 

"우리 아버지께 우리가 받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더욱 깊이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 성소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길이시고,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길이기도 하신데 너무 고맙게도 프란치스코가 이 길을 알려줬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클라라에게 프란치스코가 했듯이 길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사람인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가 바로 그런 분이고, 오늘 우리가 이 축일을 지냄은 이를 본받기 위함입니다. 

아시다시피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였고, 그리스인들을 주님께 안내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길을 찾고, 발견하고, 닦는 사람, 곧 도인(道人)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동양의 도인과 달라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동양에는 도인 개념이 잘 발달되어 있고 이 도인 안에는 구도자(求道者)와 수도자(修道者)가 있는데 우리의 구도와 수도는 이들과 달리 인격적이어야 하고 하느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도는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것이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만난 다음에는 오늘 안드레아처럼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수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Imitatio Christi라고 하는데 이와 함께 또 얘기되는 전통적 수도 방식이 바로 Sequela Christi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따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배움을 마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를 따라 한편 하느님께로 다른 한편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께로 가지만 안드레아와 다른 사도들처럼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가야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데 이렇게 길을 같이 가는 짝을 일컬어 우리는 도반(道伴)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저는 진지하게 저의 공동체 삶을 반성합니다. 제가 강의 때 입버릇처럼 우리는 공동체로 하느님께 가고 공동체로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고 하며 그러기 위해서먼저 공동체로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자주 이것을 놓칩니다. 

지금 공동체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가 주님께서 짝지어 주신 도반들인데 기도 밖 생활 중에서는 자주 그리고 순간순간 이것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구도자였고 인도자였던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오늘 말씀도 되새기며 다시 도반과 함께 떠나는 우리 길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연은 무책임과 우울함을, 필연은 책임과 기쁨을.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네 명의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안드레아가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그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라고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거니시다가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다니시다가 우연히 제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그런 분임을 알고 있었고 비록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부르심임을 믿고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필연으로 여기면 ‘책임’이 따릅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주님 뜻으로 여겨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쓰시는 이들에게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연은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연처럼 부르시는 것에도 생명을 걸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저도 뒤돌아보면 태어나서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이 저에게는 ‘행복’을 찾는 시작이었고, 우연히 접하게 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행복은 주님을 따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사제가 되기로 하게 된 것도 실제로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속성 안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일이 우연일 수 있습니까? 우연이 자녀를 임신하고 우연이 낳고 우연히 기르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가 비록 어머니가 우연히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필연입니다. 

아이가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말이 우연이라고 느끼면 그것은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필연으로 다가오면 아이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엄마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다. 앞으로 네가 잘 돼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것이고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것이다.”라고 말해주신 것이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겼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우연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 주신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에 책임을 지려 살아왔고 그것이 저에게 자존감을 주고 저를 성숙시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기쁨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쓴 임세원 교수는 2018년 12월 31일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칼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의사이십니다. 이분은 피할 수 있었으나 간호사가 위험할까 봐 나와서 피하라고 하다가 그런 변을 당하였습니다. 

이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우울증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게 오래 공부하고 많은 환자를 접했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환자들이 하면 힘이 빠지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 교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몸에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오고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시도를 합니다. 소주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먹고 반병은 몸에 뿌리고 반병은 차에 둔 채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계획하고 실행하려는데 차 열쇠가 없는 것입니다. 열쇠를 찾으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잠자는 아이들을 보고는 한없이 울고 다시 살아보자,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자는 마음으로 3년 정도의 극한 우울증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이분이 우울증이 오는 원인을 ‘왜?’라고 찾았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왜 우리 자녀만, 우리 부모만? 다른 사람들은 죄짓고 잘도 사는데…?’ 등의 물음에 해답을 할 수 없을 때, “그냥!”이라는 해답을 주면 이것들이 쌓여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우울증을 극복해본 분이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하루하루를 적극적으로 살아보자는 노력입니다. 명상하고 운동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라고 여기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없어지지만 그것이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주님께서 주시는 필연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0년 중국 산둥성에서 한 남자가 의료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아내를 극진히 간호해 8년 만에 깨어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2008년 장 씨의 아내는 임신하게 됩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어있는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이것입니다.”

다행히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산모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아내와의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책임이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믿음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결혼이 우연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았어도 지금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필연적이라 여기면 희생해야 할 것도 생깁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필연으로 믿는 이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었고 저는 사랑이 담겨있는 어머니 말씀과 행동에는 우연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래서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냥 우연으로 해답 없이 넘길 것인지, 아니면 필연으로 믿고 응답할 것인지. 

안드레아 성인도 엑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동안도 며칠 동안 설교를 하며 단 한 명이라도 더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도 필연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연은 자신과 이웃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는 것은 축복에서 제외되지만 필연적이라 믿는 것은 모든 것이 축복이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신학교에서 몇 년 동안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하다 보면 좀 더 관심이 가는 학생이 생기더군요. 이런 학생에게는 좀 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고 더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공평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특히 더 관심이 가는 학생은 꼭 있었습니다. 
 
어느 미술 학원에서 선생님의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학생이 연습하는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소묘 연습을 시키고는 잘하는지 둘러보다가, 관심이 가는 학생의 스케치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탄을 잡고 특별히 수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이날 후로 미술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더는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학생은 선생님의 도움이 자신의 그림 솜씨가 형편없어서 해주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른 학생은 아무도 이런 식의 수정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호의가 오히려 이 학생에게는 나쁜 쪽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통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이, 뒷걸음질하게 만드는 절망의 생각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세속적인 마음만 가득했다면, ‘제자가 된다고 돈과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제자가 되어서 뭘 하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부르심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의 모습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하다 말고 그물을 버리고 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긍정적인 마음이 가득 찼으며,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를 보면, 온전하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하며, 절망의 생각이 아닌 희망의 생각으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많은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편견을 재배치해 놓고 이것이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 윌리엄 제임스

 

 

만년필

 

저는 만년필로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보유하고 있는 만년필의 수도 20자루가 넘습니다. 아주 고가의 만년필은 없지만, 그래도 만년필을 계속 구매하게 됩니다. 괜찮은 만년필로 글을 쓰면 글이 더 잘 써지는 느낌이거든요. 
 
이 만년필을 발명한 사람은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큰 보험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순간, 고객이 계약서를 작성하다가 잉크를 엎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새 계약서를 다시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경쟁 보험설계사가 고객을 빼앗아 계약한 것입니다. 그는 ‘잉크가 엎질러지지 않았으면….’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펜 안에 잉크를 담는 만년필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경쟁 보험 설계사,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계약한 고객 모두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방법을 모색했기에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20)

 

그물에 집착하면 그물에 갇히고 그물에 막혀 버린다.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실천은 묶여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따른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우리 삶의 현재진행형이다. 허상과 모순을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만남이란 있을 수 없다. 

참된 만남은 언제나 새로워지는 만남이다. 새로워지는 것이 서로를 올바르게 이끄는 변화이다. 버리고 따르는 것이 깨어있는 순명의 참된 삶이다. 제대로 보게 될 때 제대로 따를 수 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또한 따름의 기쁨이다. 

삶을 새롭게 보게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변화이다. 삶의 의미는 우리의 선택과 결심으로 더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자아(自我)를 버리는 것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 된다.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실천이다. 

성 안드레아 사도를 통해 우리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새벽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주는 최고의 기쁨은 주고 받는 사랑의 기쁨이다. 주님과 하나되는 일체의 기쁨이 따름의 정수이다. 

목마른 우리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대림(待臨)같이 성숙의 여정을 걸어간다. 성장과 성숙이 빠져버린 사랑은 다시 그물에 걸리는 노예의 아픔이다. 

따른다는 것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의 가슴벅찬 뜨거운 일상의 만남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과 따르는 가운데 다시 만나게되는 갈릴래아의 일상은 아주 딴판으로 다가온다. 따름은 놀라운 일상을 건져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이다. 

대림의 발걸음이 성탄의 기쁜 만남을 낳는다. 실천없는 신앙은 새로운 일상의 예수님을 가로막는 또 다른 그물이다. 그 그물을 곧바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