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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23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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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2021년 11월 23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하며,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하시며, 그 전에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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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다니 2장 31-45절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모든 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 무렵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말하였다. 

31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무엇인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큰 상이었습니다. 그 거대하고 더없이 번쩍이는 상이 임금님 앞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시무시하였습니다. 

32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33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34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실 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35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36 
이것이 그 꿈입니다. 이제 그 뜻을 저희가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 

37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임금들의 임금이십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께 나라와 권능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38 
또 사람과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다 임금님 손에 넘기시어, 그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 바로 그 금으로 된 머리이십니다. 

39 
임금님 다음에는 임금님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청동으로 된 셋째 나라가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40 
그러고 나서 쇠처럼 강건한 넷째 나라가 생겨날 것입니다. 쇠가 모든 것을 부수고 깨뜨리듯이, 그렇게 으깨 버리는 쇠처럼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고 깨뜨릴 것입니다. 

41 
그런데 일부는 옹기장이의 진흙으로, 일부는 쇠로 된 발과 발가락들을 임금님께서 보셨듯이, 그것은 둘로 갈라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쇠의 강한 면은 남아 있겠습니다. 

42 
그 발가락들이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된 것처럼, 그 나라도 한쪽은 강하고 다른 쪽은 깨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43 
임금님께서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그들은 혼인으로 맺어지기는 하지만, 쇠가 진흙과 섞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서로 결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45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주님의 천사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온 하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하늘 위 모든 물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주님의 모든 군대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1장 5-11절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3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3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자신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아들 신부의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해 왔다며 부모님께서 웃으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속 썩이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행복마저도 포기하게 만들었기에, 부모님께는 그 아들이 십자가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때문에 부모님께서 오늘은 행복해하십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무겁고 힘겨운 십자가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십자가 때문에 행복해하고 삶의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가 그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기에 성전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성전을 지었고,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성전을 민족의 자긍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고 자랑이며 자부심인 그 성전이 무너지면서 재난이 시작되고, 또한 그 재난에서 구하여 줄 그리스도, 구원자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전쟁과 반란, 큰 지진과 전염병의 표징 또한 종말의 징조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싸우며,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를 외면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잃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 우리의 어깨를 끊임없이 짓누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두려움보다는 그 삶에서 움트는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의 가치로,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잘 속지 않으려면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종말의 때 또는 혼란의 때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유혹을 하는 자와 유혹을 받는 자의 관계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혹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유혹을 받는 것 같지만 내가 유혹을 받을 상태에 있기에 유혹을 받는 것이듯 누가 나를 속이려 들어도 결코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면 속지 않을 텐데 내가 그런 내가 아니기에 속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것도 유혹이 못 되고, 술이 젼혀 당기지 않는 사람은 술을 아무리 먹자고 꼬드겨도 그것이 유혹이 되지 못할 것이고 아예 술친구도 없을 겁니다. 

속는 것도 속이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을 사람이기 때문에 속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속을 사람이고 속지 않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뒤집으면 욕심 많은 사람이 잘 속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벌고 조금 쓰며 살겠다는 사람은 큰 돈이 된다는 속임수에 결코 넘어가지 않지요. 반대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은 사기꾼의 밥이지요. 

둘째는 고통에 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시련과 환난에 마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그런 것이 닥칠 때 많이 속지요. 

고통과 곤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늙고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뭐가 좋다는 말에 쉽게 넘어가고, 약장수에게 잘 속지요. 

그러면 고통에 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시련을 통해 단련이 많이 된 사람과 무엇보다도 시련을 통해 사랑이 성장한 사람인데, 자기 사랑이나 하느님과 이웃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 Passion의 사람들입니다. 

Passion은 우리말로 열정으로도 번역되고 수난으로도 번역되는데 열정/사랑과 수난이 함께 들어가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수난 곧 고통을 받아들이되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수난이며, 사랑하되 감성적인 사랑 그러니까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무릅쓰는 사랑이요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반대로 확신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넘어가지요. 

그런데 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단련이 되고 강해지는 거지요. 우리는 보통 의심이 많은 사람이 잘 속지 않고 잘 믿는 사람이 잘 속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지요. 

진정한 믿음과 확고한 믿음은 시련과 의심을 통과해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 확고해진 믿음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고한 믿음은 하느님을 믿기에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시련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고 구원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라는 체험을 시련을 통해서 강하게 한 사람은 환란이 닥쳐도 속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만이 지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오늘 복음은 심판의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이 일어나도, 또 전염병이 돌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가 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의 표징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왜 죽음의 때를 알려고 하느냐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마지막 때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나 죽음이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은총으로 여기길 바라십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죽음은 정말 잘만 사용하면 진정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은총입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죽음 때문에 지금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응하고 죽습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가 되었는데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동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수많은 삶의 태도들을 취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결과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 죽음은 분명 지금 삶의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올드’(2021)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한 해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혼은 결심한 프리스카는 남편 가이와 어린 자녀 둘과 함께 3일간 외딴섬 휴양지로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여기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30분이 마치 1년처럼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휴양지 리조트를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중 중 일부는 간질이나 암, 정신병 등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약회사에서 희귀한 광물로 둘러싸인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곳에 그들을 넣어놓고 자신들의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임상시험이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그래서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입니다.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벽을 통과하려고도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냥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가 더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여기고 정신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불만인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려는 부모에 의해 그도 죽습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뱁니다. 아기가 아이를 배고 뭔가 자신들도 큰일을 이뤄낸 것처럼 당당해 합니다. 하지만 아기는 시간의 빠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프리스카와 남편 가이와 두 성장한 아이들만 남은 상황에서 부부는 해변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지난날을 화해하고 죽어갑니다. 프리스카가 노래합니다. 

“사랑의 큐피드가 쏜….”

남편 가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지? 다 잊어버렸네. 이유가 뭐였든 나 당신에게 화 풀렸어. 우리 왜 이 해변을 떠나려고 했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짧은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데 썼습니다. 남은 자녀들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는 그곳을 탈출하여 제약회사를 신고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죽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차피 끝나는 삶,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죽음을 현재에 두지 않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왜 자꾸 죽음을 미래로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있습니다. 난파된 오래된 배에서 떠내려온 청나라 자기들인데 그것들의 가치는 하나당 수억 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처음 어부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영혼이 있고 또 그 안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하느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생존만 생각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못한 상류층 유대인 부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 프랭클이 물었습니다. 

“고생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납니까?”

“저는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밥 먹고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고통이 올 때 수용소에서 여러 자세를 보입니다. 탈출하려고 하고 절망하고 미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자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이 없는데 더 배고픈 이에게 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음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는데 나의 가치를 생존만이 아닌 더 고귀하게 만들어 보자는 결단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인간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죽음을 기억함’입니다. 이 죽음을 미래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썩히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면, 하느님께서 죽음이란 것으로 인간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그냥 흘려버리지 맙시다. 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면 저절로 자신의 존엄성을 높여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지금 커다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 지지도 또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를 건네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속으로는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약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이 무뎌지고 힘차게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시간이 약일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단해진 상태의 나로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하니 슬픔을 너머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기억나게 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기억하면서 단단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고통과 시련으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었을까요? 수많은 아픔을 기억하면서 단단해졌기에 성공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을 동반하는 순간, 나의 단단해짐을 떠올려 보십시오.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단단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출신이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성전의 위상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서울에 가서 높은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이 다르긴 다르구나.’라면서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만 연연하면 할수록 고통과 시련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에서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삶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 삶의 규칙은 일을 즐거움으로 만들고, 즐거움을 내 일로 만드는 것이다.

- 에런 버

 

 

모닝콜

 

새벽 다섯 시.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받으면,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축일 날, 가장 이른 축하의 인사를 늘 부모님께 이렇게 받았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님 걱정에 매일 부모님과 통화할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새벽에 잘 못 일어나요. 5시에 모닝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모닝콜을 해주셨고, 이를 무척이나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들 신부 도와주고 또 새벽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4시 전에 일어나기에 5시에 굳이 모닝콜을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계속하실 수 있도록 부탁을 했었습니다. 
 
작년 4월 15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올해 8월 21일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새벽의 모닝콜 전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축일 때 괜히 서글퍼졌습니다.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부족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루카 21,9)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시작도 끝도 사랑의 신비안에 있음을 아신다. 이제 산(山)은 겨울 숲으로 바뀌고 있다. 비워내고 떠나보내는 겨울 숲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비워내야 사랑할 사람이 보인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하는 모든 은총이다. 삶과 죽음 이 모두를 다시 생각한다. 거스를수 없는 구원의 여정이 우리들 삶의 모든 여정이다.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우리들 시간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허물어지고 사라져야 잃어버린 방향을 다시 찾게된다.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방향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실상 하느님께서 없는 방향이란 없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 있는 우리들이 다시 소중한 사랑을 만난다. 

참된 사랑이 참된 방향이며 참된 구원이다. 사랑은 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이 끝과 저 끝또한 내 것이 아니다. 시작도 하느님의 것이며 끝도 하느님의 것이다. 종말은 하느님을 알게되는 구원의 가장 분명한 사랑의 선물이다. 

사랑하기 위해 허물어짐도 부서짐도 필요한 은총이 되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이 있다. 끝은 하느님이시며 끝은 사랑이다. 그래서 끝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다. 

사랑,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구원의 힘찬 새로운 시작의 이름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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