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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2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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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2021년 11월 20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안티오코스 임금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닫고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간다고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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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마카 6장 1-13절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그 무렵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가고,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져 갔나이다.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없애셨으며, 그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0장 27-40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0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청문회, 아니면 국회에서 실시하는 대정부 질문 영상을 보면서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내 생각과 주장이 옳음을 드러내려고 질문합니다. 나아가 상대방 자체를 판단하고 규정지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판단과 확증 편향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분을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체험했던 하느님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만나십니다. 또한 나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십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배움, 체험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를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논쟁으로 사두가이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녀 온 그들의 신념을 예수님의 한마디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여유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한 이해와 판단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그러한 열린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도 사두가이는 아닌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루카 20,27)

오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고약한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사두가이들을 보면서 저도 질문을 던집니다. 이들은 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할까? 부활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며 제게 부활은 희망이며 믿음의 대상임을 다시금 확인을 하게 됩니다. 

우선 제게는 부활이 없으면 안 되고 부활이 없고 하느님도 없다면 저는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일찍이 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 세상, 죄와 악이 판치는 이 세상을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하느님이 안 계시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면 고통뿐인 이 세상을 빨리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저이기에 요즘도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동변상련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저 세상 삶 곧 부활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이 세상 삶도 행복하고 살만 하며, 저 세상 삶도 살만 하다고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내 인생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느님이 없으면 저 세상을 희망할 수도 없고, 하느님이 없으면 부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나와 내 인생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전능하시기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부활케 하실 거라고 믿고 희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믿는 것이고, 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믿고 이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저 세상도 주시는 분이지만 저 세상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도 없고, 이 세상에서의 인연도 끊어지며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태어납니다. 

이제 더 이상 아내와 남편이 아니게 되고,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이 아니게 되며,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두가이는 하느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라고, 그래서 부활 믿음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 인연이 전부이며, 이 세상에 인연에 매이는 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나도 또하나의 사두가이는 아닌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고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 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 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 태어남입니다. 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 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 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 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 범죄자들이 종종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쓴 글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나’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많은 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고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되는 길도 열립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하느님께서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맞다는 생각을 가지면 닫혀 있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성장한다.

- 쟈닌 갱동

 

 

나이 듦

 

나이 듦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멀리 건널목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서도 힘들어 뛸 수 없을 때, 약병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의 처방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주름이 낯설어 보일 때, 무엇보다 “신부님도 이제 늙었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나이 듦이 싫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이 든 내가 젊었을 때의 나보다 분명히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기다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난날보다 분명히 성숙해진 ‘나’이기에 지금이 좋습니다. 과격한 운동을 할 수 없어도 걸으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암기력이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쳤던 젊은 날이라면,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늘 좋은 순간만을 선물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38)

 

하느님의 정체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하느님이 결코 아니시다. 산 이들의 하느님 사랑을 오늘 만나는 것이다. 끝이 없으신 하느님 사랑이시다.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오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오늘이다. 구원을 이루시는 오늘의 사랑이시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체험은 시작된다. 하느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시다. 

살아있는 숨결로 하느님을 뜨겁게 찬미한다. 오늘의 언어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 생명의 길 위에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산 이들의 하느님을 통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할 순간은 지금 바로 이순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관계는 없다. 오늘의 관계를 살리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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