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1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18.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

 

 

2021년 11월 18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을 죽인 마타티아스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이들을 모아 광야로 내려가 자리를 잡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도성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18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마카 2장 15-29절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느님은 찬란히 빛나시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내 앞에 모여라, 나에게 충실한 자들아,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 하느님, 그분이 심판자이시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은 분에게 너의 서원을 채워라. 불행한 날에 나를 불러라. 나는 너를 구해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9장 41-44절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8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의미의 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예전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굉장히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싸우고 나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자주 울컥합니다. 강의를 할 때도,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조용히 눈물을 훔칠 때가 많습니다. 

‘눈물’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전혀 다른 감정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분노하거나 억울하고 안타까울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눈물의 의미는 ‘감동’과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에 감동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공감해 주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지 못할 때 억울해하며 눈물을 보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엿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뻔한 결과를 그들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억울함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변하지도 달라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또한 그들이 겪을 아픔에 대한 공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혼란에 빠져 얼마나 힘들어할지 걱정하고 아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안타까움에, 분노와 슬픔에,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눈물을 흘리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모습, 당신 뜻을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흘리시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의미의 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를 보고도 우시지 않을까?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지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모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도 모르고, 아무튼, 그 모름이 멸망의 이유인데 제 생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주님이 오셨는데도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논법인지 모르지만 저는 자주 이런 논법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불행이 무엇이냐?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행복의 길도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행복을 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같은 논법을 멸망이란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구원을 배척한 것이
멸망이다. 


궁지(窮地)에 몰렸습니다. 아니, 사지(死地)에 몰렸습니다. 이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알려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와서 그 길을 알려주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면 죽게 되겠지요. 

사는 길을 아는 사람, 그것이 말하자면 도사이고, 주님이야말로 도사(道士)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과 심판.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면 구원을 배척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멸망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도 우시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화는 곧 나의 환경 : 나의 환경은 내가 지키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듯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세속적인 평화였습니다. 그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 영원한 평화를 알아볼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평화를 깨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는 것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평화가 깨집니다. 

얼마 전 평균 고도가 2m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 투발루 외교부 장관이 바닷물 속에서 연설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는 육지였습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 섬나라 주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높은 산지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평화가 깨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 살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은 심지어 많은 수가 걸리는 암과 같은 질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한상도 씨는 자연식물식을 하여 1년 3개월 만에 전립선암이 완치되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펴낸 책이 『수술도 없이, 약물도 없이 사라진 암』입니다. 2020년 암 진단을 받은 저자는 2021년 식이요법만으로 암세포가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의사는 당장 수술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암이라는 것은 결과물이고 암이 생기게 된 원인과 과정을 돌아보고 수정하고 치유하여 앞으로도 암이 살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입니다. 수술로 당장 보이는 암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보이는 암은 물론 보이지 않는 암까지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암이 생기지 않게 하는 삶의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은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입니다. 그리고 “2020년 5월 25일.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암 진단을 받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 대부분은 그가 암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삶을 살던 자신을 죽이고 ‘생활 태도’를 뜯어고친 것입니다. 

“나는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와 달리 내적인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먹는 음식이 달라지고, 생활습관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먹던 습관을 버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었다. 육류와 생선, 우유, 계란, 밀가루, 가공식품을 완전히 끊었고, 과일과 채소, 현미잡곡밥에 채소 반찬을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1만 보 이상 걸었고, 주말에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했다. 암을 치료한다는 생각 대신 몸과 마음을 재생시킨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뿐이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에 가까운 것을 묵묵히 실천했을 뿐이다.”

나의 생활 태도가 바로 건강을 위한 나의 환경입니다. 이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병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병이 침투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생존을 위협하는 병은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은 없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안전할까요?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 안에서 평화롭습니다. 동물 새끼들도 어미가 보호해주면 안전하다 느낍니다. 우리가 생겨났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어머니 태중이었습니다. 태중의 아기는 부모의 태중에 머무는 것 하나만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존 A. 셰드는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녀를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사춘기가 되면 자녀는 더는 부모가 자신들의 평화로운 환경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찾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교회가 어머니입니다. 참 평화는 내가 하느님 태중에 있음을 믿는 것으로 얻어집니다. 순교 성인들은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평화로웠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자 안에 머묾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창조자를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양식과 보호와 가르침을 주는, 곧 살과 피를 내어주는 대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리시기 위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라고 하시며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신 신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만이 우리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피난처를 자신들이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태중에 머물며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간이나 그곳에 머물려면 그 공간을 제공하는 이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암을 극복하려면 그것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에 머물려야 하는데 그 공간에 머무는 방법이 자연식물식단법이었습니다. 어느 공간이나 법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끼는 평화가 이미 땅이 아니라 하늘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합니다. 

태중의 아기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어머니의 뜻을 어길 줄 모릅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평화를 찾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평화롭습니다. 내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 자체인 내가 죽고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놀기 바빴습니다. 학원 다니는 아이도 없었고, 선행 학습이라는 말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학원 안 다니는 아이 찾기가 힘듭니다. 선행 학습은 당연한 것이 되어서, 학교에서는 당연히 알 거라면서 진도를 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또 엄청난 데이터가 그 안에 공개되어 있어서 자료를 찾는데 책보다 검색하는 것이 더 빨라졌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손안에 엄청난 지식을 담고 있으니, 늘 새로운 지식을 소유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억지로 하는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억지로 시켰는데 3년만 지나도 옛 지식이 되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요? 혼자 공부하는 것을 읽혀야 새로운 지식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억지로 끌어주는 신앙이 아닌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바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고자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비유라는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쉽게 설명을 해주셨지만,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시지만 트집을 잡더니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인간의 모습에 슬피 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이 필요한 것을 계속 청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그 옛날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는 유다인들처럼 기적을 자신에게 달라고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세속의 뜻만을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으실까요? 잘못된 자녀를 보고 마음속으로 우는 부모의 마음이며, 빗나간 길을 걷는 당신 백성을 보고 눈물 흘리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떤 이가 주고받는 말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감정을 건드리고, 우리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

- 백수린

 

 

좋은 우리 글 만들기

 

중세 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무조건 라틴어로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자국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라틴어 성경을 자기 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1521년,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교황청은 강력하게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독일어로 특히 궁중에서 쓰는 고급 언어가 아닌 일반 백성의 언어를 기준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 독일어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더군요. 
 
많은 언어학자가 언어는 만들어져 가는 도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 한글의 역사는 세종대왕 때부터이니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자에 밀려 언문으로 불렸고, 일본 강점기 때기에는 이 언문마저 제약을 받았습니다. 
 
속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속어도 우리의 한글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우리의 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평화는 십자가를 닮아간다. 평화는 자기방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며 말씀하신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아픈 죽음이 있다. 십자가속에 평화가 있다. 사랑이 깊으면 십자가도 깊다. 

영원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아가 무너져야 숨지 않는 소통의 사랑이 된다. 사랑보다 욕심이 앞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 머물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픔이 욕심이다. 예루살렘을 내려놓아야 예루살렘이 보인다. 위령성월은 우리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 무너져야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이다. 

평화의 관계는 참된 사랑의 관계이다. 우리가 사랑한 욕심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린다. 무너져야 다시 보게된다. 우리가 잊고 사는 평화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이다. 막을 수 없는 평화이다. 

오늘 우리의 참된 평화가 이하루를 새로이 여신다. 평화는 십자가와 함께 사는 은총이다. 평화의 기쁨! 바로 오늘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