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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1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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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2021년 11월 15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율법서를 불태우게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자 그의 믿음을 보시고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15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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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마카 1장 10-15절, 41-43절, 54-57절, 62-64절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악인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나이다. 그들은 당신 가르침을 저버렸나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죄인들의 올가미가 저를 휘감아도, 저는 당신 가르침을 잊지 않았나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사람들의 억압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지키리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당신 가르침을 멀리하는 저들, 사악한 박해자들이 다가왔나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악인들은 당신 법령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들에게는 구원이 멀리 있나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저들, 그 배신자들 보며 저는 역겨워하나이다.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8장 35-43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5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운전을 하다가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조등도 켜져 있었고, 터널 안에 전등들도 이상 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알고 보니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썼던 선글라스 때문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만 벗으면 될 일을 기계의 오류나 터널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어떤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보다는 세상과 주변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거나 내 생각을 받아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지요. 볼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루카 18,31-34 참조) 바로 다음에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곳 예리코는 갈릴래아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루카 9,51─19,27 참조) 중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예리코의 눈먼 이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발생합니다. 그 색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신의 색안경이 어떤 색깔인지 바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잠자코 있어서는

 

오늘 복음은 중도 맹인이 다시 시력을 찾는 얘기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난 것을 보면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부러 찾아간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다시 시력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없으면 시력을 되찾는 은총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맹인에게 은총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요 꿈도 꾸지 않았는데도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의 그는 미적거리다 기회를 놓치거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지람에 간청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 은총을 받게 될 때 우리가 갖춰야 할 양면적 태도 곧 수동성과 적극성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앞서 봤듯이 은총이란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은총을 받기 위해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트리듯 해서는 안 되고, 흥부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기도하지도 청하지도 않고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칼 라너라는 분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요. 

"기도는 성사보다 중요하다. 많은 영혼이 성사를 받지 않고도 구원되지만,  기도 없이 구원받은 영혼은 결코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은총은 본래 사람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은총이 우리 행동에 선행되어 무상으로 주어짐이 사실이라면, 그 은총이 제일 먼저 일으키는 반응이 마음의 움직임인데, 이 움직임을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게 일컬어 ‘기도’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이 일 때는 잠자코 있어야겠지만 은총이 주어질 때도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총에 맞갖은 열망과 갈망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받고 난 뒤에는 오늘 맹인처럼 감사와 찬양이 솓구쳐야 하며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맹인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단지 눈의 치유가 아니라 구원이었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것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맹인을 부러워하고 또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이 누구나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모태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리코의 한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군중에게 알게 되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의 믿음이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주님은 내가 청하기만 하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상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그는 그만한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이 소경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모녀가 그분에게 찾아와 상담하였답니다. 어머니도 우울증 증세가 있으시고, 딸도 대인기피증이 있어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딸의 무의식 세계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딸이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급기야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아 답답해. 아 답답해. 너무 비좁아…. 그런데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데, ‘넌 죽으면 안 돼.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 이런 음성이 반복해서 들려요.”

이 말을 듣자 함께 있던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딸을 잉태하고 있을 때 자신이 배를 어루만지며 자주 했던 말이랍니다. 당시 남편은 외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임신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리라 의심하여 낙태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라고 하며 아기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 청년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서 당당히 사람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곧 세상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려운 존재가 되면 세상도 그렇게 됩니다. 

『벼랑 끝, 상담』에 ‘분노조절장애와 망상으로 학교 선생님을 아빠라고 믿는 딸’의 내용이 나옵니다. 집도 부유했고 아이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신의 성이 왜 아빠가 아닌 엄마 성을 따르는가가 궁금했었습니다. 결국, 중3 때 엄마에게 이 사정을 물었고 엄마는 언젠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본래 미국에 살림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국에서 사업하다가 엄마를 만나 다은이를 낳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은이는 아빠를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아빠가 미국에 갈 때 왜 엄마가 그리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점차 아빠는 사업도 실패해서 다단계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단계에서 만난 여자와 또 바람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이는 친구들이 이 사정을 알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친구들을 멀리했으며 조금씩 아버지에게 막말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분노조절장애로 사고를 치는 다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유일하게 역사 선생님이었고 다은이는 역사 선생님을 자기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버지는 가짜라고 여겼습니다.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다은이는 급기야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은이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고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칼로 찌르겠다면 설쳤습니다. 아버지가 딸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집을 나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 집에도 이 사실이 알려져 미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딸은 청년이 되어서도 폐인이 되어 어머니가 더는 볼 수 없어서 상담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우선 역사 선생님이 다은이의 친아버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 선생님을 설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했고 그제야 다은이는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도록 했으며 최면 명상을 이용하여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서른 번이 넘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은이는 아버지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고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은이 아버지도 외도를 멈추고 다단계에서 나와 직장에 취직하여 다은이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와 아주 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용서를 청했고 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자 다은이도 다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결국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는 꿈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아버지에게 얻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아이와 하나입니다. 어머니은 아버지에게 가는 다리라면, 아버지는 세상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누가 형성해 주어야 할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주님께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비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 성직자들을 보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단상에 올라와도 모자를 달라고 해도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에게 다가오기를 꺼리고 왜 어떤 이들은 교황님의 모자도 받고 교황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까요? 교황님이 좋으신 분이란 믿음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예수님도 그런 자비로운 분일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께 모든 것을 청할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키워줄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는 아마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알파고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실제 그런 내용의 영화도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몫을 많은 부분에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파고가 바둑만 잘 두지, 요리하거나 또 특별한 운동을 아주 많이 잘하지 못합니다. 이 영역까지 담당하기 위해서는 더 엄청난 데이터와 메모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원 스위치가 꺼지면 잘하는 바둑까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인공지능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고귀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없는데,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대신할 수 없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더 굳센 믿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 믿음 없이는 자신의 존재에 감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소경이 보여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곧바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먼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진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조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분명히 자신의 눈도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고 있지만, 그 방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내 믿음의 정도를 따져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방해에도 상관없이 꿋꿋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온전하게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름다움이란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 나희덕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어떻게 해야 갈증이 해소될까요? 당연히 물을 마시면 됩니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 갈증이 말끔히 해소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물을 마신 뒤에, “휴~ 이제 살 것 같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잠시 뒤에 또 목이 마르게 됩니다. 분명히 수분을 보충했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물이 혈류에 도달하기까지 20여 분이 걸립니다. 따라서 물을 마신 즉시 실제적인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에 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마시는 순간에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착각이었습니다. 뇌가 물을 마신 결과를 예측해서 갈증을 해소한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를 속이고 있으며, 이 속임에 쉽게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착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물며 세상의 거짓된 것을 구분하기가 어떻게 쉽겠습니까? 
 
속임수에 넘어감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또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집중하면 그만입니다. 그 후는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떨어져내리는 꽃잎도 나뭇잎도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된다. 다시 보아야 할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다시 보게되는 내면의 시간이다.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볼 수 없기에 또한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참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치유는 간절함에서 비롯된다. 

간절함과 간절함이 만나는 것이 영혼의 참된 만남이다. 내면과 내면이 만나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찬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믿음은 다시 볼 수 있는 삶의 기쁨이다. 다시 볼 수 있는 우리들이 삶에 진정 감사할 수 있다. 주님과 우리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시 볼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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