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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1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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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2021년 11월 17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모두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드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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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마카 7장 1절, 20-31절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그 무렵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0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21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22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24 
안티오코스는 자기가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의 말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말로 타이를 뿐만 아니라 약속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25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그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소년에게 충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라고 강권하였다. 

26 
임금이 줄기차게 강권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27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조상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28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29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0 
어머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젊은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나는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소. 모세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법에만 순종할 뿐이오. 

31 
히브리인들을 거슬러 온갖 불행을 꾸며 낸 당신은 결코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계명의 길 꿋꿋이 걷고, 당신의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9장 11ㄴ-28절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비오니 복된 엘리사벳을 본받아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백성을 힘껏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7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순명의 가치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자 우리는 ‘순명’(順命, oboedientia)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셨기에, 그 삶을 본받아 순명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회는 권고합니다. 

사제로서 그 삶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명의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저에게 그 일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반대되는 것을 명령하시고, 원하지 않는 것도 명하십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렵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령을 따릅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의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명’이지만, 가끔은 그 안에 희생과 의무만 있고 기쁨은 사라져 버릴 때도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평생을 주인 곁에서 심부름만 하던 종들에게, 주인이 나누어 준 돈으로 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막막하기도 하고,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잘못해서 돈을 잃으면 벌이 기다리고 있음에 두렵기도 했겠지요. 

어떤 종은 주인이 이 과제를 주며 명령한 이유와 주인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르다고 비판하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그 과제 안에서 자신의 이유를 찾으려 고민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불평과 불만, 두려움과 나태함으로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예.”라고 대답만 할 뿐입니다.

순명의 가치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이해하려 고민하고, 행동하려 고민하고, 같은 것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흔적이 순명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순명의 길을 오늘도 나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왜 악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까? 셋째 종은 왜 하느님을 달리 보고, 다른 두 종과 달리 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 제 마음속에 있는 대로 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셋째 종의 마음속엔 냉혹함이 들어있겠지요.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셋째 종을 악한 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 다른 곳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신 바가 있지요.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에게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신다고. 

이렇게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하신데 선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좋아하는 데 비해 그 자비를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지요. 

오늘 셋째 종도 주인이 미나를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런 주인을 냉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 주셨는데도 안 줬다고 하는 것이고, 주는 것은 없이 뺏어만가는 조폭과 같은 분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주셨는데 왜 안 주셨다고 생각하고 주시지는 않고 뺏어만 간다고 생각할까요?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입니다. 주신 것이 내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거나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일 경우입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은 욕심이 많거나 천상 것이 아닌 지상 것을 원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선한 사람은 욕심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에 조금 있어도 많다는 사람이고, 최악을 각오하기에 최악만 아니어도 선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선한 사람은 영적으로 선한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첫째 종이나 둘째 종처럼 하느님께 많이 되돌려 드리지 않고, 그저 하느님의 선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만 해도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크게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감 가지지 말고, 하느님을 선한 분이요 사랑이신 분으로 알아만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선한 사람이 되자고 소박하게 생각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감사 한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법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루카 19,11-28)입니다. 

한 미나는 100데나리온,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을 주며 벌이를 하라고 분부하고 왕권을 받기 위해 멀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주인을 싫어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주인의 돈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한 이들과 함께 엄벌에 처해집니다. 이 사람의 한 미나는 열 미나를 번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벌어야 하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의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까지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한 미나 그대로 주인에게 내어준 종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 백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픔도 따릅니다.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서 그 백신을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스스로 내 안에 넣어 나에게 영향을 주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려 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든 내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체로 내 안에 오십니다. 내가 성체에 감사하지 못하면 나는 성체를 영해도 그분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유일하게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감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은 ‘한 미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중물과 같은 감사 거리입니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죽고 맙니다. 장사 밑천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의 시작은 한 미나인데,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감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하느님을 많이 알렸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신 마비 환자였던 미즈노 겐조(1937-1984)입니다. 그는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눈과 귀 이외에 온몸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겐조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에게 상경을 한 권 주고 갑니다. 겐조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겐조는 12세 때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겐조는 18세가 되던 해 시를 쓰기로 합니다.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50글자로 된 일본 문자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갈 때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들을 이어 시를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네 편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란 시는 그가 괴로움을 묵상하며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겠죠.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내가 묵상할 거리입니다. 겐조는 어머니의 죽음도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는 순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묵상기도가 주는 열매입니다. 모든 것은 감사로 바뀝니다. 

또 이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말씀’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해 시를 쓰기로 하게 된 이유를 ‘잊기 전에’란 시로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잊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보인 것
마음에 느낀 것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의 아름다운 은혜를
찬양하는 시를 만들자.

묵상하는 자는 감사가 솟고 그 감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인 주님 때문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여 주님께 보답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미나만 받았다고 그것에만 감사를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 방법은 다섯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습관 기르기’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와 같은 예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의지를 따릅니다.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한다면 머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묵상을 하지 않았기에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십일조도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도 잃고 하느님 나라도 잃고 카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엔 사생아로 태어나 폭행과 마약 등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카인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가 나병 환자들을 보며 감사를 묵상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품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준비한 이에게 들어오셔서 당신 나라로 삼으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열 미나를 번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종의 한 미나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감사의 마음’임을 잊지 말고 쉼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찾아내려 성령으로 이성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50번 정도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뇌가 묵상기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감사가 열로 늘어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한국 문화의 해외 진출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참 많이 올라갔습니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정점을 찍고, 아카데미 수상에서도 한국 영화가 최고 작품임을 알립니다. 여기에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케이팝(K-Pop)과 케이무비(K-Movie), 케이드라마(K-Drama)는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던 때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을까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 사전심의가 대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고,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냐면서 부정적인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없었고, 자연히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냥 일반적이고 무난한 작품만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이 안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케이컬쳐(K-Culture)로서 국가의 위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간섭을 줄이고 자유를 늘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주님의 무책임한 방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귀족이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습니다. 귀족이 돌아온 뒤, 어떤 종은 열 배로 또 다른 종은 다섯 배로 불립니다. 그러나 주인인 귀족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합리화로 얼버무리는 종의 미나는 빼앗아서 열 미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투자를 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들을 열심히 사용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똑같이 하나의 미나를 나누어주시듯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저 사람만을 더 사랑하실까?’라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능력이 없어서요’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책임감을 갖는 일은 사랑하는 연습이다. 사랑이 피어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 두려움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끌어안는 과정이 필요하다.

- 임경선

 

 

Good & New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Good & New’라는 놀이입니다. 게임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24시간 이내에 있었던 좋은 일(Good) 혹은 처음 했거나 처음 경험한 일(New)을 1분 안에 말하는 게임입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하는데, 사소한 일도 괜찮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약간 야단법석을 떨며 손뼉 치며 기뻐해 줘야 합니다. 
 
이 놀이는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게임처럼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놀이 후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오는 것을 즐거워했고, 일상 삶 안에서도 계속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을 찾아 행하는 적극적인 아이가 된 것입니다.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은 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내 마음에 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도 적극적으로 기뻐해 줘야 합니다. 그때 더 좋은 효과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잘하였다, 착한 종아! (루카 19,17)

 

나눔은 단풍처럼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 우리들 삶인가. 삶은 진정한 나눔처럼 요란하지 않다. 빈 손이 아니라 나눔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길이 사람의 길이 된다. 우리를 믿고 맡기신 소중한 삶이다. 맡기신 삶이기에 아주 작은 일에 우리는 충실하고 성실해야 한다. 누구나 성실을 알지만 삶에 성실하지는 않다. 성실하다는 것은 수건에 싸서 보관하는 냉혹함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하는 삶의 기쁨이다. 

삶과 죽음의 중심에는 우리의 하느님이 계시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된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나눔이 있다. 나눔이 하느님 나라의 뜨거운 울림이다. 

우리에게 건네주신 나눔의 삶임을 잊지말자. 하느님과의 만남은 나눔의 이야기이다. 이와같이 삶의 끝은 어디인가. 새로운 나눔이 시작이 되시는 하느님이시다. 진심어린 나눔이 잘한 것이며 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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