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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1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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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일 -

 

 

2021년 11월 14일 (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세계 가난한 이의 날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했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연중 제33주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

 

 

✠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자는 재앙의 때가 올 것인데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14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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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다니 12장 1-3절

 

그 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10장 11-14절, 18절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3장 24-32절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시어,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비유를 깨달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 수 있게 깨어 기다립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4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예수님의 말씀과 뜻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때,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갑작스러운 지인의 비보에 하던 일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룬 것보다 앞으로 하고 싶고 이룰 것이 더 많은 분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믿기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일찍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건강을 돌보셨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 상태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몸에서 이상한 징후와 조짐이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이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넘겨 버릴 때도 많습니다.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많은 경우 그런 징후와 징조를 흘려버리는 이유는 자신의 몸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징조가 나타나는데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을 하느라 그 징조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종말의 시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후와 징조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말씀, 예수님의 가치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징조를 발견하더라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사건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를 준비하시고자 말씀하신 그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음식이 버려질 때,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일회용품을 사용할 때,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함과 편리함을 위하여 자동차를 타고 전등을 켤 때, 지구 반대편은 홍수와 가뭄으로 몸살을 앓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뜻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때,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일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잃지 않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손에 죽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때'를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입니다. 

이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핵으로 해 지구가 멸망하게 될 시간이 1953년에는 7분 남았다고 했는데 2020년에는 핵과 기후 변화로 인해 100초가 남았다고 하다가 그저께 영국 글레스코에서 폐막한 Cop26 곧 '26차 유엔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영국 총리는 이제 1분 남았다고 하며 이 시계를 우리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되돌려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왜 종말의 시계를 만들었겠습니까? 그것은 종말이 가까웠음을 사람들이 인식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제 루카 복음에서 주님도 노아의 때와 룻의 때 사람들이 멸망의 때가 다가오는데도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들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다가 멸망의 때를 맞이했다고 경고하셨지요. 

그렇지만 종말의 때 곧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또한 말씀하시며 누구도 종말이 언제라고 떠들지 말라는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종말의 때뿐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오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구의 종말인지 아니면 지구는 그대로 있으면서 인류만 소멸하는 건지. 그리고 또 지구를 멸망케 하는 것이 하느님이신지 아니면 인간인지도.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인한 지구 위기를 얘기하며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데 반해 오늘 복음과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 멸망의 때를 정하시고, 그 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록 우리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세상이 멸망하게 될지라도 하느님께서 멸망케 하시는 거라고 믿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죽게 된다면 누구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병들어서 죽지도 않으며 주님의 손에 죽고 주님 품 안에서 죽고 싶은데,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죽고 싶을 뿐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그래서 위기를 느끼고, 이보다도 더 큰 기후 위기와 지구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우리를 멸망케 하는 것은 전염병도 기후도 아니고 하느님이고, 그 멸망의 때를 정하는 분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년에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벌 곧 흉년과 패전과 흑사병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다윗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오늘 첫째 독서 다니엘서도 보호자 미카엘에 의한 재앙의 날을 얘기하며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멸망의 때에 우리는 결코 병이나 사람에 의해 죽지 말고 하느님의 손에 그리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멸망 :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때 우리는 세상 종말과 심판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대로 가면 지구는 100년 이내에 멸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종교가 망하고, 한 나라가 망하고, 온 인류가 망하더라도 우리는 구원되어야 합니다. 커다란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대로 가면 안 됩니다. 망하는데도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리고 이런 종말에 관한 것은 우리 각자의 세대에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멸망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법칙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사라지면 인간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관계가 단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태양이 어두워졌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한 아홉 번째 재앙이 어둠이었습니다. 모두가 소경이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본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자기 혼자 남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엔 언제나 죄를 짓고 주님을 잃어 이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시도합니다. 지구가 멸망하여 자기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습니다. 그의 꿈은 누군가와 접촉해서 자신도 인간임을 느끼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살 직전에 라디오 주파수에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그 주파수를 따라갑니다. 아파트 단지가 나옵니다. 몇 시간 동안 모든 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한 방을 뒤졌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죽어있었고 카세트테이프가 무한 재생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그 여자 옆에 잠이 듭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시까지 봅니다. 아기가 자기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자신도 미쳐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까지 다시 나타납니다. 죽은 여인의 환영이라 생각한 그 남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도망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남자는 방금 그 여인은 사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그 여자를 쫓아갑니다. 여자는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그 남자에게 총을 쏩니다. 그렇게 그 남자는 죽어갑니다. 마지막 그 여자가 남자의 눈을 감겨줍니다. 그 접촉만으로도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FINITE’라는 단편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죽는 편이 낫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이 살아있구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모두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똑같이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종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다른 게 필요 없습니다. ‘삼구’(三仇)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멸망의 법칙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돈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쫓으셨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건 종교이건 나라건, 세상이건 멸망의 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로몬도 결국엔 돈에 집착하여 여러 나라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적인 데서 구원을 추구합니다. 당시 유다인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자기 내면엔 자아가 왕으로 있기에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내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육적인 인간일 수 없습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탐할 정도로 육적인 인간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것이 세 번째 법칙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떨어지니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에게 자유를 빼앗는 폭력을 쓴다면 서로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친교는 무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도전자로 보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이미 영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리비아에서 40년 넘게 독재를 했던 카다피는 국민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이 리비아 모든 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육체적인 타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글라스를 왜 끼느냐고 할 때 자신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고 폭력으로 망했습니다. 그는 실제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삼구로부터 자유로웠던 분들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력을 쓰지 않으셨는데도 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을 쓰지 않는데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분들은 멸망의 법칙과 반대로 갔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삼구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세상에 살면서 혼자가 되는 고통을 겪게 만들고 그렇게 멸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현재 우리 각자가 맞게 될 종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중심에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 안에서 주님과 사귈 줄 알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며 겸손하여 누구의 자유도 강요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 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영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위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의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이신 것입니다. 

삼구를 좇으며 있거나 말거나 한 사람, 오히려 사라졌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나는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 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멸망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신학생 때 어떤 교우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학사님! 학사님은 늘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학사님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앞으로도 쭉 행복하세요.” 
 
당시 저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신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냐는 불안감과 성소에 대한 의심으로 부정적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를 향해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이분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이분의 말씀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에 그 자체로 행복해 보인 것입니다. 즉, ‘조명연’이라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조명연이 함께 하는 주님을 보셨기에 제가 행복하게 보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과 함께하기는 그 길이 쉽지 않지만, 그곳에 늘 행복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대부분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느님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이로부터 행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행복의 길이었음을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실제로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큰 환난에 이어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두려움 속에 살라는 것일까요? 우리를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 이끌기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진짜 행복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마르 13,32)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이므로,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행복의 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다니엘 예언자가 말하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다니 12,1 참조)..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기꺼이 본래의 자기대로 사는 것이다.

-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신학생 때 어느 신부님의 강론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신학생이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았는데, 다음 정거장에 너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탄 것입니다. 그 미모에 자꾸 시선이 갔습니다. 얼른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이 아가씨는 빈자리를 찾다가 신학생 옆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잠시 뒤, 이 아가씨가 피곤했는지 졸다가 신학생 어깨를 베개 삼아 자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유혹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유혹은 분명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유혹은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포기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더 힘들게 하기에 안 됩니다.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이겨내면 다음에는 훨씬 이겨내기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가까워집니다. 
 
어렵고 힘듦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겨냈을 때의 기쁨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훨씬 힘이 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마르 13,32)

 

11월의 남은 단풍잎들이 오늘의 바람에 떨어져내린다. 벌써 연중 제33주일이다. 시간을 붙들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울고 웃던 모든 시간이 소중했다. 슬픔과 기쁨은 우리네 인생의 소중한 몫이다. 

소중한 것들과 가난한 것들 사이에 구원의 복음이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마지막까지 찾으시는 주님이시다. 버려진 것과 사라질 것들 사이에 가난이 있다. 

모든 아픔의 시작에는 가난이 있다. 가난하기에 자주 넘어지고 자주 통곡하는 아픈 삶이다. 고통과 비참을 끌어안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가난의 흔들림을 지나치지 않으시는 나눔의 주님이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눔이 있어야 한다. 

분주한 일상안에서도 가난한 이를 기억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은총의 오늘, 주일이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가난의 족쇄를 푸는 사랑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가난에 가려진 인격을 다시 되찾아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과 일상을 어루만져 주신다. 우리의 모든 길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나누고 사랑해야 할 순간은 오늘이라는 시간이다. 오늘이 나눔이고 감사이다.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뜨거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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