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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2021년 11월 16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는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묵으시며,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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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마카 6장 18-31절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19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20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목숨이 아까워도 법에 어긋나는 음식은 맛보는 일조차 거부하는 용기를 지닌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22
그렇게 하여 엘아자르가 죽음을 면하고, 그들과 맺어 온 오랜 우정을 생각하여 관대한 처분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23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애, 많은 나이에서 오는 위엄, 영예롭게 얻은 백발, 어릴 때부터 보여 온 훌륭한 처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법에 합당하게 고결한 결정을 내린 다음, 자기를 바로 저승으로 보내 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화답송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셨네.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 어찌 이리 많사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하느님이 저런 자를 구원하실까 보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셨네.
주님, 당신은 저의 방패, 저의 영광, 제 머리를 들어 높이는 분이시옵니다. 제가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시나이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셨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기에, 누워 잠들어도 나는 깨어나니,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무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저의 하느님.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셨네.
복음
루카 19장 1-10절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6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6일 (화)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지금 어떤 열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난 7월, 미사를 부탁받아 한 본당을 찾았습니다. 마침 『매일미사』에 묵상 글을 썼던 달이라 강론을 묵상 글의 내용으로 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묵상한 글이고 내가 살아왔던 나의 이야기이니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다르고, 듣는 사람들이 다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듣는 우리가 변하기에, 그 의미와 메시지도 때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마음이 성경에 대한 저의 열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열정이 변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저의 목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열정이 사라집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자캐오는 부자이면서도 그 돈이 자신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면 그는 계속 세관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권력을 얻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면 그는 권력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예수님을 보려고 모인 많은 사람, 키가 작으며,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 열망이 위기에 부딪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고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변화하고 구원되는 모든 과정의 시작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 열망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 그분과 눈을 맞추고 싶은 열망,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살아가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사랑하고 싶은 간절함,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간절함이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것이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손을 잡고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어떤 열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늙어서도
오늘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는 나이 많고 풍채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인격도 고매하고 신앙심도 대단한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도 나이는 많을 것이지만 키가 작아서 풍채는 볼 품 없고 당시 멸시를 받던 세관장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은 나이 많은 것은 같지만 대조되는 인물들인 셈입니다. 그래서 늙은이들의 모범으로 두 사람을 한 번 다뤄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아자르는 그저 자존심 강한 늙은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를 너무 얕이 보는 것이고 제대로 평가한다면 자기 인격을 하찮은 것에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찮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 하찮은 것이 자기 목숨이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가장 소중한 것이고, 그러니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저는 이 대단한 사람을 별로 닮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사람은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닮고 싶지 않고 특히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 비교하면 더더욱 닮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 제게 엘아자르라는 존재는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너무 완벽하고, 그러니 너무도 완벽하지 않은 저와는 이미 너무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간미랄까 사람 냄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 학자이기 때문인지 율법적인 옳음이 느껴지지 복음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저와 마찬가지로 흠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의화하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성장해가고 그래서 늙어 성숙해지는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 옳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이고, 그러나 사랑을 원하고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느님 사랑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는 작은 사람입니다. 키만 작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작은 사람입니다.
너무도 다행인 것은 그 나이에도 나무에 오를 정도로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주님 사랑에 가 닿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장이 멈추고, 굳어지고, 화석화되며, 사랑이 시들해지는 것이 보통인 늙은 나이에도 나무에 오름으로 주님을 자기 집에 오시게 한 자캐오가 무척 부럽고 닮고 싶은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욕망의 종말 :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책을 많이 읽습니다. 특히 하루에 350페이지를 읽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이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로는 책을 아주 급하게 읽게 됩니다. 이렇게 급하게 빨리 읽다 보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에 다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읽는 데에만 몰두해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이해하려면 잠깐 책을 덮고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책과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성급하게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도 성급하게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 위해서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나의 입장만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이해하는 시간이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8,25 참조). 그런데 부자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은 부자냐 가난이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자캐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만 애썼습니다.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로라하는 부자가 채신머리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면서 자캐오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한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명예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 법정 스님
인간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명절 때가 되면 가게 앞에 또 마트에 가도 많은 과일 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커다란 과일 상자에는 과일 몇 개만 달랑 들어있는 것입니다. 과대포장이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상자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과일이기 때문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커다란 상자에 드문드문 담는다는 것입니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사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적당한 틈이 있어야 상처를 받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인간관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당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루카 19,6)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이 여정이 멀다. 고운 단풍잎이 먼저 아래로 내려앉는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다. 내려와야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
내려와야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할 수 있다. 부여잡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게된다. 버리지 않고서는 내려올 수 없다. 내려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이다.
내려오니 가야할 길이 보인다. 언제나 회개의 마지막은 예수님께 기쁘게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는 자캐오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오늘의 길을 되찾아준다.
내려와야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져 내려 오셔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이시다. 자캐오 드디어 예수님께로 내려와 내려오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얼른 기쁘게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온 거기에 기쁜 회개가 있고 기쁜 오늘이 있다. 삶의 해답은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변화이다. 단풍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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