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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2021년 11월 12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요사팟 주교를 시성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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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지혜 13장 1-9절
세상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
3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5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6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7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8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9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화답송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복음
루카 17장 26-37절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천상 잔치로 저희에게 용기와 평화의 성령을 보내 주시어 저희가 거룩한 요사팟 주교를 본받아 교회의 영광과 일치를 위하여 기꺼이 저희 삶을 바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2일 (금)/p>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2일 (금)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한 내가 변화하고 회개한 때의 시작점인 것처럼...
얼마 전 ‘섬뜩한 오늘?’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글에서는 하느님께서 ‘오늘’이라는 일상의 삶 안에 찾아오실 때마다, 인간은 엇갈리게 행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이라는 시간은 해가 뜨고 지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발생하는 변화의 측정 단위로서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삶의 방향이 바뀌는 기회의 때이며 결단의 때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달력은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오늘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일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롯 시대에 소돔이 멸망하던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인 오늘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이 ‘오늘’이라는 일상이 아닌 ‘오늘’이라는 마지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물리적 시간인 ‘오늘’이 아닌 변화와 결단의 때인 ‘오늘’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섬뜩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한 내가 변화하고 회개한 때의 시작점인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종기도
오늘 주님은 멸망의 때를 얘기하십니다.
노아와 룻의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홍수와 하늘의 불과 유황이 "모두 멸망시켰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멸망이 분명히 있고, 멸망의 때가 분명히 있는데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보지 못함을 말씀하시며 그 대표적인 예로 룻을 드십니다.
멸망의 때가 분명히 있고 멸망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가까이서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고나 병으로 죽는 것을 많이 보고, 그런 죽음이 아니더라도 부모와 가까운 친척이 죽는 것을 보는데도 멸망 다음을 보려고 하기보다 뒤 곧 멸망할 세상을 돌아보잖습니까?
그런데 뒤를 돌아보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고 직면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지요.
뒤를 돌아본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랄까 반대는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죽음 너머를 보지 못하기에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하고, 직면하기 싫기에 죽음도 외면하고 죽음 너머의 하느님도 외면하게 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죽음 너머에 하느님이 계심을 안다면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싫어서 뒤를 보지 룻처럼 않을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에 대해 걱정하고 그래서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고통은 많아질 텐데 그것들 안에서 또는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만 보는 저일까 봐 걱정하고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선종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인데 선종이란 것이 고통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이 닥쳐도 인간적으로는 그것들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는 것이요, 신앙적으로는 그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루를 끝내며 매일같이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성무일도 기도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인데 거룩한 죽음이 바로 선종인 것이고, 거룩한 죽음이란 하느님을 만나는 죽음이요 하느님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이지요.
이것을 묵상하는 위령 성월이고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을 찬미할 때 평화가 오는 이유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하느님 나라’가 이룩된 사람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오늘은 그렇게 주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면 그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나는 주님의 집에 살고 있고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뜻’은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고 그 뜻을 따름은 그 사람에게 속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늑대에게 자라 늑대의 뜻을 따라 늑대처럼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늑대에 속해있고 늑대 가족 무리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자라 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자라는 아이라면 당연히 그 부모에게 속한다 생각하고 그 부모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아의 홍수 비슷한 것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는데 우리 집이 그나마 가장 높이 지어져서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엔 우리 집으로 다 모입니다.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헬기가 와서 지붕을 뚫고 저희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조금 자라서도 큰 홍수가 또 났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다 모였습니다. 길과 논의 구분이 사라졌고 어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땠을까요? 팬티만 입고 나가서 물놀이하고 놀았습니다. 어른들은 논으로 빠지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는 미군 부대 바로 옆이기에 미군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미군들이 철책을 끊고 보트를 끌고 우리를 구조하러 왔습니다. 팬티만 입고 여군들도 있는데 보트에 타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여관에서 머문 뒤 돌아왔을 때는 동네에 물이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부모님을 믿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동네는 홍수가 잦아서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지켜주고 계심을 잘 믿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때 아버지는 일 나갔다 돌아오실 때 마을에 홍수가 나서 들어오실 수 없으셨는데 수영을 하셔서 저희를 구하러 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뜻을 따라주는 대상에 속함을 알고 그 대상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당연히 내가 주님의 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뜻을 따라주는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분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속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뜻이 양식과 가르침을 통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향한 희생을 통해 들어옵니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의 뜻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내가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의 뜻은 자녀 안에서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사라집니다. 따라서 내가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살려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속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사하고 찬미하는 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면 나도 모르게 그분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평안을 찾습니다.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입니다. 평화롭지 않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찬미하는 이는 죽음도 이기시는 주님 품에 안겨 있음을 느끼고 평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예를 드십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입니다. 이때 방주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을까요? 방주는 바로 그리스도의 품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면 그 뜻이 내 주위에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홍수와 같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또 천사들과 탈출하고 있던 롯이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천사에게 감사하고 그 품에 있으면 유황이 자신들 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 집착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를 찬미하는 이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어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자아를 따르고 찬미하기에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지었을 때 하늘에서 빛나는 구름이 지성소 계약의 궤 안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그 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만 지키면 하늘로 연결된 통로요 사다리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다리와 같습니다. 이 지상에 살지만 실제로 언제든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생깁니다. 이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평화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그러면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악을 틀어주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은 간수들에게 조금 맞고 독방에 갇힐지라도 나는 언제든 밖으로 나갈 탈출구를 파 놓았습니다. 그러니 감옥이 더는 두려움을 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세상이 즐기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얼마 전,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했습니다. 미루고 미뤘던 정리였습니다. 하나씩 꺼내 보며 필요한 것도 또 반대로 필요 없는 것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서랍 깊숙한 곳에서 너무 좋은 펜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마음에 무척 들어서 아껴 쓰려고 서랍 속에 잘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끼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보니 아예 사용도 못 한 것입니다.
작년에 모친상을 치르고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본인은 아주 낡은 이불을 덮으시면서, 이 새 이불을 아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낀 새 이불은 제 용도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아끼다가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용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아낀다고 해도 이 세상의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처럼 아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기에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고, 롯 시대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는 데려가고, 또 다른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시지요.
이 사실을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을까요? 당연히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꾀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치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주님을 굳건히 믿고,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겸손하게 이웃에 봉사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 항구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끝날이 와도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언제일까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추스르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느님께서 발걸음이 휘청거리게 내버려 두신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직 그분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대가 완전히 쓰러지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손을 꼭 붙잡으십시오.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초성 게임
우연히 예능 프로그램을 봤는데 초성 게임이 있었습니다. 단어의 초성 자음 2개를 말하면, 순발력과 어휘력을 발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ㄱ, ㅅ’이면 ‘감사’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이 유행인가 봅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데도 종종 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에 간 꼬마 아이가 돌아다니다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와 묻습니다.
“아빠! ‘시옷’하고 ‘미음’으로 시작하는 글씨가 뭐야? 어느 문에 초성으로만 쓰여 있어.”
이상한 마음이 들어 아이의 손에 이끌려 그 문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入口(입구)’였습니다.
맞습니다. 한자였습니다. 입구라는 한자어였지만, 한자를 모르는 아이는 한글의 초성 정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익숙한 것을 모든 상황에 맞추다 보면 진리에 더 멀어질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루카 17,32)
무엇을 정말 사랑하는 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욕심이다. 멈추어야 할 우리 삶의 욕심이다. 보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지금 이순간이다. 과거로 가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다.
결단의 순간이 왔다. 과거를 떠나야 현재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무거우면 떠날 수 없고 빠지면 나올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하느님께 내놓는다.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욕심이 아니다. 욕심은 소금 기둥을 이루고 주님의 뜻은 우리를 살린다. 살아있는 이 순간을 소금 기둥이 되게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삶의 마지막은 소금 기둥이 아니라 부활의 삶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회개가 이어진다.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려야 할 우리들 생명이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소금 기둥이 아닌 삶의 새로운 모습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욕심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시체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가 사랑이며 기도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위해 기도드리는 위령성월이다. 생명이 욕심을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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