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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8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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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

 

 

2021년 11월 8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정의를 사랑하고 주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그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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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1장 1-7절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제 말이 혀끝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당신은 이미 다 아시나이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시나이다. 너무나 신비한 당신의 예지, 저에게는 너무 높아 닿을 길 없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7장 1-6절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8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8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많은 이의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내 선택과 결정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내 아집과 욕심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 오만인 줄은 압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인 사제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 있겠지만, 그 ‘옳음’ 때문에 공동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 옳음은 아마도 ‘그른 것’일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사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생각은 “비뚤어진 생각”이며 “미련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공동체가 분열하여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서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제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청원이 바로 저의 청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비롯된 굴레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하여 한 발짝 물러서는 용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자매를 걸고 바다로 내던져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충고가 사랑이 되도록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저는 용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용서를 잘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ㅈ더 근본적으로 저는 용서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일찍 돌아가신 것 때문에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때 막연히 그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다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신 하느님 때문이라 생각하며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한 적이 있고 가난한 저희를 도와주지 않는 친척이나 과부라고 저의 어머니를 무시한 이웃을 한 때 원망하고 미워하는 정도에서 용서하지 못한 적은 있지만 수도 생활 안에서 행복을 발견 후에는 용서할 일이 별로 없었지요. 

누구 때문에 불행해야 그를 용서할 수 없는데 누구 때문에 불행하지 않기로 한 이후에는 용서할 일도, 용서한 일도 별로 없었던 거지요. 

기껏해야 누가 저를 오해하거나 무시하거나 모욕을 주거나 하는 정도인데 그것이 무슨 큰 상처가 되고 불행케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지 않은 회칙 22장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영원과 영적 유익의 차원에서 우리가 뭣을 보면 모든 것이 용서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두고두고 원한을 품을 것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 것은 그로 인해 끝까지 불행한 경우인데 이렇게 되면 처음 상처를 준 것은 상대방의 탓이고 죄이지만 용서치 못하고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 것은 이제 내 탓입니다. 

그러므로 남 때문에 내가 상처받고 불행하고 죄 지었다고 남 탓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때 한 때 그럴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계속되고 계속 용서치 못하는 것은 나의 미성숙이 계속되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내 탓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음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는 주님 말씀에 대해 보겠습니다. 

옛날에는 겁도 없이 형제들을 막 꾸짖었습니다. 나는 꾸짖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것을 지적해주는 것뿐이라고 강변하면서. 

그런데 사랑으로 잘못을 알려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상대에게는 사랑이 아닐 수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데이트 폭력처럼 사랑의 폭력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사랑이고 원하지 않는 방식이면 폭력이잖아요? 그러니 형제의 잘못을 꾸짖을 때 그것이 상대에게도 사랑이 되도록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조심해야 하고, 잘 식별을 해야 하며, 사랑에 불순물과 폭력이 없도록 정화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도 봐야 합니다. 내가 충고함에 있어 지금 내게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없을지라도 상대방이 아직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기다리면서 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물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충고가 사랑이 되어 상대방이 회개하게 되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들을 향한 가스라이팅, 이젠 그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시고 하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로서는 우리가 자아와 원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사탄과 자아와 그로부터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타인을 죄짓게 만드는 일은 멈출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마치 자아와 사탄처럼 누군가를 똑같이 죄짓게 만든다면 사탄과 마귀가 영원히 벌 받게 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자아나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죄짓게 할까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고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조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는 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연극에서 비롯된 말로 갖은 방법을 써서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자기 맘대로 조종하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서 약을 먹입니다. 아내를 사랑해주는 척하다가도 자신이 감추어놓은 물건들을 아내가 옮겨놓았다며 아내가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남편이 아내를 얻어 그 집으로 이사 온 이유는 그 집 위층에 자신이 보석이 탐나 살해한 노부부가 있는데 그 노부부의 보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잣집 여자를 유혹하여 그 아랫집을 사고 밤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석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올라간 뒤 정확히 10분 뒤에 자신의 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윗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다른 집들은 조금 어두워지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기 정확히 10분 전에 방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15년 전 위층 노부부를 살해한 사람이 남편이고 남편이 자신까지 미친 여자로 만들어 보석만 찾으면 자신을 정신병원에 버려버리려고 한 것을 밝혀냅니다. 

이렇듯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공범이 되게 만드는 에덴동산에서 ‘뱀’이 했던 것을 의미하는 현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잘잘못을 묻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와를 자기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하였다면 그냥 마귀요 사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심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자가 됨으로써 그냥 마귀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가정에서 어느 정도는 이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뱀의 역할을 하여 자녀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녀들을 자신들과 같은 욕망을 추구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벼랑 끝, 상담』의 성적 때문에 조현병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항상 싸우는 사람이었고 아이가 7살 때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 죽으러 간다.”라고 말하며 나가버립니다. 아이는 불안하여 엄마에게 전화하였는데 엄마는 즐거운 목소리로 곧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엄마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찢어버리고는 그것밖에 못 하느냐며 눈물을 흘리고 웁니다. 아이는 엄마를 위해 왕따를 당해가면서 공부만 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신발 끈을 묶고 음식을 먹고 학교에 가는 것까지 모두 다 해 주며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분명 서울대 갈 아이라면 계속 부담을 줍니다. 길거리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노동자 주제에!”라고 깔보는 말을 하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교육합니다. 성적 외에는 아이의 생활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하였습니다. 

아이는 외고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집단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공부에 대한 공포감이 가중되어 결국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저녁 식사 때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너는 왜 이 모양이냐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숟가락을 놓고 말했습니다. 

“성적이 밥 먹여줘요?”

“뭐?”

“성적이 밥 먹여주느냐고요?”

“너, 미쳤어? 지금 엄마한테 뭐라는 거야!”

엄마를 소리를 꽥 지르며 아들을 발로 찼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느낍니다. 

“제기랄! 그만 좀 하라고! 이 미친 아줌마야! 넌 성적이 다냐? 성적만 좋으면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그는 식탁을 엎어버린 뒤 밥그릇을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밥그릇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지호야, 왜 그래!”

아빠가 아들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빠에게도 욕을 했습니다.

“왜 그래? 너는 내가 왜 그러는 거 같아? 서울대? 서울대는 너도 못 간 주제에 왜 나보고 가라 말라야! 나쁜 놈아!”

부모는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착한 아이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실성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절에 감금시키다시피 하고 돈을 들여 그를 공부하게 감시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부모에게 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꼭 유명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힘으로 억누르는 히틀러를 존경하고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르바이트 두 시간 하는 것도 남들보다 못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아이를 죄짓게 만든 것일까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아이일까요, 아니면 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모일까요? 물론 그 부모도 그 부모에게 그렇게 성장하여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끊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맘대로 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유태인처럼 성인식을 치러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첫영성체입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서 자녀를 형제로 대해줘야 합니다. 옆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고 더는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자유를 내 뜻대로 하려는 시도입니다. 뱀이 그랬고, 마귀가 그랬습니다. 이제 첫영성체를 했다면 아이 스스로 하느님과 성모님을 부모로 여기고 그분들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 맘대로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제 아버지가 하느님이고 제 어머니가 성모님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봉헌이 지금은 매우 힘들겠지만 나중에 위 예처럼 자녀에게 칼에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위 자녀도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에 가방에 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에게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부모와 자녀 사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성인으로 대해줌으로써 몇 년 흔들리고 올바른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7살 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그때 술과 담배도 하며 화투만 치며 방학을 지냈지만 그렇게 저를 어른으로 대해주신 것이 부모님께 가장 큰 감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믿어주셨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졌고 아무 눈치 보지 않으며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들어 맷돌을 메고 바다로 가라앉는 게 나을뻔한 그 사례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거짓 명목으로 하느님 자녀를 나의 인생에 편입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첫영성체 이후에는 자녀의 자유를 건들면 절대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여름과 겨울 날씨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덥고 또 습한 날씨, 여기에 엄청난 비를 뿌리는 여름. 그리고 너무 춥고 또 운전하기 힘들게 엄청난 눈을 뿌리는 겨울. 모두 싫은 날씨입니다. 그래서 봄과 가을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맑은 하늘을 보여주는 날씨만 ‘날씨’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폭풍우, 천둥, 번개, 안개, 눈, 소나기 역시 ‘날씨’입니다. 즉, 날씨란 내가 좋아하는 날씨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좋은 날만 내 삶이고, 어렵고 힘든 날은 내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좋은 날뿐 아니라 나쁜 날 역시 나의 삶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과 나쁜 날 모두를 포함해야 내 삶이 완성되는 것이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날을 거부하려고만 하고 있으며, 그런 날은 내 삶이 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쁜 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쁜 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도 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그 자체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모든 날에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만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절대로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한두 번이야 용서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도 하루에 자그마치 일곱 번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믿음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해줍니다. 
 
이 사실을 사도들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부족한 믿음을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그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대화의 기술’이란 배려와 역지사지다. 말하는 내 입장보다 듣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 문유석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전히 외향적인 사람 또는 순전히 내향적인 사람 같은 건 없다.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유명한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스스로를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외향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한 가지의 모습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융의 말처럼 정신병원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MBTI 세미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나눠서 좀 더 사람을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격유형에 맞춰서 고정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어느 한 부분의 성격으로 고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죄와 믿음 사이에 용서가 있다. 믿음이 가는 길은 언제나 용서이다. 용서는 사람이 가야 할 구원의 보편적 가치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기에 겨자씨 한 알만 한 용서도 없다. 

용서를 밀어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거듭 말하지만 믿음의 실천은 죄를 용서하는 용서의 실천이다. 죄 앞에서 무너지고 용서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 삶이다. 용서의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용서를 이루어내시는 주님이시다. 참된 행복은 우리가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믿음은 정신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를 다시 만나게한다. 

하느님을 닮은 인격은 참된 행복을 향해야한다. 참된 행복은 참된 믿음이며 참된 믿음은 참된 용서이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용서로 맑은 믿음을 얻게 되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부끄러운 믿음을 아프게 성찰하는 위령성월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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