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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2주일 -
2021년 11월 7일 (일) 평신도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평신도 주일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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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열왕 17장 10-16절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화답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제2독서
히브 9장 24-28절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복음
마르 12장 38-44절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렙타의 과부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 말씀이 들립니다.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7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7일 (일)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위선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거짓과 가식으로 꾸며진 삶, 겉으로는 선함을 자랑하면서 진심을 숨기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저 또한 위선적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 조금은 포장한 삶을 보여 주려 하였습니다. 신자들과 면담할 때에도 진심을 담아서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사제로서 해 주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에 더 신경을 집중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비판하십니다. 율법 학자의 가식을, 부자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판하시고, 그런 그들보다 가난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과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문득 ‘가난한 과부도 위선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성격과 가르침을 알고 있는 과부였다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것을 미리 짐작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금함에 넣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지요. 쓸데없는 의심이고 그릇된 전제에서 나오는 상상임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위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선은, 어쩌면 가식적인 행동이나 과시의 외적 표현보다는, 이기적인 의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이른바 꼼수를 부리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위선적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을 포장하기도 하고,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포장과 과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본다면, 가난한 과부의 행동 같은 포장이나 과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귀엽게 보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단지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가난한 과부의 작은 봉헌이 부자들의 큰 봉헌보다 크다고 칭찬하시며 크고 작음의 다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씀에 저를 비춰보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만약 누가 제가 지금 하는 사업에 성금을 내실 때 부자의 성금과 과부의 성금 중에서 누구의 성금을 제가 더 반기고 누구의 성금에 제가 더 고마워할지 생각하면 부끄럽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분의 작은 성금을 더 고마워하겠지만 반기는 것은 부자의 큰 성금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의 작지만 큰 성금이 더 큰 사랑이고 봉헌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성금을 더 고마워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사업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부자의 크지만 작은 성금을 반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사랑의 사람이고 사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사랑을 기준으로 상대하지만 제가 욕심의 사람이고 필요와 욕심을 채우는 것이 급선무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내 필요와 욕심을 기준으로 상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것이 있고 욕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필요한 것이 없을 정도로 자족하시고 사랑의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는 사랑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아가면서 사랑 말고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랑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결핍과 욕심이 있으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봉헌한 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으스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비슷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바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인데 여기서 바리사이는 자기가 세리와 같지 않고 의롭고 십일조도 잘 낸다고 뻐기지요.
사람 앞에서 뻐기는 것으로 부족하여 하느님께도 뻐깁니다. 그런데 으스대고 뻐기는 것은 다 사랑과 상관이 없지요. 마치 군사 퍼레이드하듯 사람들 앞에서 퍼레이드하는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퍼레이드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하느님 앞에서도 퍼레이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봉헌을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고 반기시겠습니까? 이런 과시적인 봉헌은 큰 성금을 좋아하는 저도 역겨워하니 하느님은 더더욱 반기지 않으시고 역겨워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런 봉헌에 하느님께서 상을 내리실까요? 아무리 큰 액수일지라도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상은 오늘 엘리야에게 밀가루 단지를 박박 긁고 기름병을 탈탈 털어 빵을 만들어준 과부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겸손과 사랑의 단지는 채워주시지만 과시와 욕심의 단지는 비워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봉헌 없는 기도 : 뱀의 소굴로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기도와 과부의 기도를 대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가진 재산을 다 넣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많이 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은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타인의 가산마저 등쳐 먹는 자기를 키우기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가스라이팅 기도’라 하고 싶습니다. 가스라이팅은 본래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상대를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면 이는 나와 펫(애완동물), 혹은 나와 물건의 관계가 됩니다.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상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나와 하느님 사이,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렇게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됨과 동시에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딸이 취직하여 자취할 때도 찾아와 온종일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딸이 엄마가 이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엄마의 폭언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따위로 대해? 딸년이 돼서 엄마를 생각할 줄도 모르냐, 미친년아. 네가 그러고도 잘 될 것 같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를 하며 풀었습니다. 엄마를 피해 자취방을 몇 번이나 옮겼지만, 엄마는 며칠도 안 돼서 딸을 찾아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야 더는 엄마가 못 찾게 방을 옮겼고 드디어 평화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 청년은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자친구를 통해 받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너무 낮다 보니 엄마가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정말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톡에 바로 답장을 안 하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직장까지 자신이 알아봐 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하며 아예 집을 나와 자신과 동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으니 마치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를 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남자도 자취방을 여러 번 옮겨보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했던 방식으로 며칠 만에 금방 남자친구를 찾아냈습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최고야 원장을 찾아왔고 최 원장은 여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였습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1%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도 마지막 화해를 위해 여자 친구의 자취방에 들어가기로 하였는데 단, 조건이 두 개 있었습니다. 원래 다니던 직장에 다시 다니게 해 주는 것과 여자의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이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건들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유의 공간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남자친구가 자기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싸우다 텐트를 부숴버렸습니다. 그토록 미운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것을 자신도 남자친구에게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조금씩 남자친구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카톡을 1시간 동안 보지 않아도 참아내고 남자친구를 자기 집에 살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잘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필요하여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이 자유롭게 머물 공간을 내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욕구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소유욕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욕구가 있다면 소유욕입니다.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자유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분명 자신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텐트를 부숴버리면 그 사람은 내 안에 있어도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거나 그걸 견디지 못하면 도망갑니다. 이렇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절대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자유를 내어주는 것을 자기 봉헌이라 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욕구로 타인들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에게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명예를 높여달라거나 자녀가 잘되는 것만을 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머물 공간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주님에게 내 안에서 공간을 허락하는 첫 번째 시도가 소유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주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그 공간을 얻으시기 위해 원하셨던 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봉헌하는 곳에 주님께서 내려오시는데, 그 자리를 뱀의 것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구약과 신약 내내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고 이젠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봉헌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보시는 것은 봉헌이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어주는 것인가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모든 가산을 봉헌하였기에 자기 뜻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욕구가 사라진 과부 안에 하느님은 한가득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십니다.
미사 때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봉헌을 해야 할까요? 바로 과부와 같이 “내 뜻을 봉헌하니 당신 뜻이 온통 나를 차지하소서.”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례 때 모실 성체가 머물 자리가 나에게 마련됩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유를 드리기 위해 내 욕구를 내어드리는 봉헌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이 누군지 폭넓게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듀크 대학교 교수 새러 가이더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폭넓게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재밌는 친구, 공을 잘 던지는 사람, 케첩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다양한 존재인지 생각하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창의성이 향상되었음을 이 작업을 통해 분명히 보여줍니다.
창의성 향상은 아이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치매에 관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치매로 가족들의 어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늘 사고하며 뇌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뇌 세포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새러 가이더 교수의 ‘자신이 누군지 폭넓게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뇌 건강을 위해, 함께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특히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합니까?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다양한 모습 모두를 사랑해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사랑의 이유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받을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지금을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 세와 십일조 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금고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헌금이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부자는 드러내는 봉헌을 위해 많이 넣었던 것이고, 가난한 이는 상황이 어려워서 조금만 넣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드러내기 위한 봉헌이기에 하느님께 바치기보다는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이는 노동자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보잘것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적은 액수라 할지라도 봉헌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받을 이유였습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이 됩니다.
남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헌금하는 부자가 많은 돈을 내는 마음 그리고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가난한 이의 마음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헌금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은 우리가 애정을 느끼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된다.
- 바뤼흐 스피노자
이해할 수 없어!!
큰형님이 결혼한 뒤, 다른 가족들과 형네 집에 놀러 갔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져 오는 것입니다. 화장실을 얼른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습니다. 형 집에는 마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과 마당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요? 지금의 이야기는 1980년 초반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파트에 처음 가본 것이었고, 실내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은 야외의 마당 구석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형님께 물어서 들어간 화장실이었지만, 이곳 역시 낯설었습니다. 우물 같은 것이 화장실 변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화장실에 욕조와 세면대도 함께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2021년에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라며 화를 내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일까요?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빠른 판단보다는 주님의 판단을 곰곰이 새기면서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마르 12,42)
어우러져 사는 우리들 공동체이다. 가톨릭의 빛은 공동체의 빛이며 공동체의 핵심은 우리 평신도들이다. 평신도들이 평화로우면 교회도 평화롭다. 평신도들의 빛은 세상을 밝히는 내면의 빛이다.
탄생과 성장 아픔과 죽음 이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신앙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십자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봉헌이 신앙이다.
사람을 잘 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며 바로 평신도의 길이다. 사람이 공동체이며 사람이 길이 된다. 우리 가톨릭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성장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내면의 성장이다. 내면이 아름다워지는 그 만큼 세상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생활속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바로 평신도의 정체성이다. 신앙은 생활을 끌어안고 생활은 복음을 풍요롭게 한다. 생활과 복음 사이에 평신도가 있다. 교회 구성원들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고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길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요즈음이다. 건강한 바탕은 건강한 기도이다. 건강한 기도는 생활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중심이다.
다시 기도의 끈을 다시 내면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은 모두 한국 천주교회의 소중한 평신도들이다. 신앙은 생활을 건너뛸 수 없다. 복음의 생활 그 치열한 현장에 우리 평신도들이 살고 있다. 소중하고 소중한 삶의 스승들인 평신도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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