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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1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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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

 

 

2021년 11월 10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했습니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은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했습니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임금들의 권력과 통치권은 주님께서 주셨다며,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힙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10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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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6장 1-11절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쓰러지리라.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7장 11-19절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양식으로 자라나는 교회를 인자로이 이끄시어 교회가 주님 사랑의 섭리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온전한 신앙을 끝까지 간직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0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하느님께 정말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하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보지만 일은 점점 더 꼬여 가고,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러한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바라며 하루하루 가슴을 졸입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였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 또다시 기적을 바라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주받은 이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사람들의 만류에도 목청 높여 예수님을 부릅니다. 가엾은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기뻤을 것입니다. 행복하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 주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또 다른 기적을 바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기적을 일으켜 주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순간은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의지하고 떠나지 않을 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그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그 응답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절망의 순간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께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믿는 순간, 하느님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무엇이냐면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이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책을 읽다가 어느 의사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암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늦게 발견해서 치료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은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가질 수 있었다며 이렇게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죽을지 모르는데, 저는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런 행운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사 선생님은 죽음을 삶의 단절로 보지 않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삶에 대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미래를 확신하고 있기에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삶이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이를 위해 회개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희망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보는 사람은 좋은 일, 긍정적인 일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삶에 감사해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나병 환자들은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던 나병 환자였기에,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은 실질적 치유가 필요하였지만,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인 치유 인정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올립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9명은 유다인이었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을 경배하는데, 하느님 경배를 민족성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은 치유된 것을 알자 다른 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만큼 위대한 가치는 없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아이를 키우기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했는지 몰라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면서 복사도 섰었는데…. 지금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매일 게임만 하고…. 한심해 죽겠어요.” 
 
모범생이었던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직장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모범생이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패션 디자이너의 책에서 “우리 아이를 패션 디자이너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혹시 모범생이에요?”라고 다시 묻는다고 합니다. 만약 모범생이라고 하면 다른 길로 인도하라고 권한답니다.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고, 부모님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에게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틀을 깨지 못해 내적 갈등을 엄청나게 겪을 수 없다는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앞선 그 아이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은 모범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틀을 깨는 독창성을 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생기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기도 합니다. 
 
모범생은 누구의 모범생일까요? 부모의 모범생을 세상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까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18)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듯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는다. 하느님을 잊고사는 씁쓸한 우리들 모습이다. 감사와 믿음이 빠져버린 관계는 이미 죽어있는 아픈 관계이다. 가장 깨끗한 치유는 하느님께 먼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은 치유와 믿음으로 하느님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만든다. 치유와 믿음은 그래서 둘이 아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치유와 믿음이 나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당연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우리의 감사이다. 삶의 중심축에 있어야 할 감사의 실천이 감사의 삶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간절한 우리의 기도가 된다. 우리 삶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여정은 치유의 여정을 걸어가고 감사와 함께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한다. 

우리 삶안에 감사가 있는 지를 묻게된다 믿음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깨끗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린다. 이미 무한히 열려진 믿음의 길이다. 

그 믿음의 길 위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되는 우리들이다. 아무도에서 드디어 마침내로 돌아오는 깨끗한 믿음의 자녀들이 우리들이다. 믿음을 청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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