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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2021년 11월 13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자녀들은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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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지혜 18장 14-16절, 19장 6-9절
홍해에 마른땅이 나타나자
그들은 어린양들처럼 뛰었다.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19,6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화답송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그분은 그 땅의 모든 맏아들을, 모든 정력의 첫 소생을 치셨네. 이스라엘이 은과 금을 들고 나오게 하셨네. 그 지파들에는 낙오자가 없었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당신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한 말씀 기억하셨네.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복음
루카 18장 1-8절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3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3일 (토)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가치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서로 논의해서 역할을 나누고 같은 목표를 보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팀(team)이며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각자의 목표보다는 전체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신뢰, 그 목표를 향하여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자신을 이용해서 다른 이의 목표와 욕심을 채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마련이며, 그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믿지 못하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습니다. 어른은 잔소리나 하는 꼰대이며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일 뿐입니다.
국민은 정치인을 믿지 못합니다.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법은 나에게만 불평등합니다. 서로 의심하는 사회, 모두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공동체, 상대를 누르지 못하면 패배하고 낙오된다는 시대의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 신앙은 어디 있을까요?
믿는 사람,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까? 하느님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하느님의 법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습니까?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청을 드립니까? 하느님의 가치는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기도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기도이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기도이며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가치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체 없으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 세상에서 과연 찾아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아무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그간의 우리 경험 때문입니다.
기도하자마자 그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제게는 한 번도 없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렇기에 주님께서도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매번 지체 없이 들어주셨다면 낙담하지 말라고 하실 필요가,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다른 뜻이고 우리가 청하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의 주인은 주님이신 하느님입니다. 언제 들어주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빨리 들어주십사고 청하고 요구한다고 빨리 주실 분이 아니고 당신께서 생각하실 때 가장 좋을 때라고 생각하실 그때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을 때가 언제인지 너무도 잘 아시고 우리보다 잘 아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 생각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계시고,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고 믿는 것도 참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오늘 주님께서 물으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즉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그럴 때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며, 즉시 들어주실 때 지체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때의 주인이시고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더 좋은 것과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거나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아직 안 들어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즉시 들어주실만한 때가 되면 지체 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떼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이 그대로 보입니다.
얼마 전 한 아이가 밥 먹어야 할 때 밥은 먹지 않고 게임하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먹으면 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럴 때 현명한 엄마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써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아기가 마음 바꾸기를 바라다가 바꾸면 즉시 들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옳고 좋은 것을 바라게 되면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게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한 가지
여름의 막바지에 휴가를 떠났었습니다. 특별히 부친상을 치르면서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충북 단양에 걷기 좋은 길들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푹 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동시에 많이 걸으면서 몸도 마음도 회복할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지에서 출발해서 막히는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쭉 가다가 드디어 고속도로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했기에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가 쉬면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지갑이 없는 것입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지갑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돈 한 푼 없고, 신용카드도 없어서 밥 한 끼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2시간 갔던 거리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충북 단양까지는 8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무조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챙겨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 가는 것도 입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가겠다고 말하면 그만일까요? 꼭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과부는 돈도, 그리고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공정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그리고 성가시게 재판관을 조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이 여인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떤가요? 나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안돼’라는 포기의 마음으로 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가난한 과부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님 앞에 나가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한 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적절할 때에 건네는 좋은 말은 ‘가장 긍정적이고, 삶을 지지해 주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선물이 될 수 있다.
- 할 어반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혼자 휴가 가는 것은 참 좋습니다. 사제로 살기에 많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랜만에 혼자의 시간을 가지며 침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식당에 들어갈 때 깨닫게 됩니다. 휴가 중이라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데, 대부분 2인 이상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의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요? 장점과 단점의 조화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장점만을 보면서 기쁘게 살고, 또 다른 이는 단점만 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휴가 중에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걷다가 오전 11시 20분쯤 그 식당에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딱 한 자리가 남아 앉았는데, 그 뒤 더 많은 사람이 밖에서 대기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없고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아져서 바빠지니 싫은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화도 자주 내서,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힘들다는 단점만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와 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 18,1)
삶이 있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가 있기에 삶은 더더욱 풍요롭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해답을 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참된 기도는 절실하기에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기도는 우리의 삶 자체를 비추어준다. 그래서 기도는 생활이며 생활은 기도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일상이다. 기도가 없으면 내적 기쁨도 없다. 모든 것의 출발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자신이 바뀌게된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평화를 체험하게 한다. 이와같이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사랑이며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자세를 낙심에서 희망으로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과의 내적교감에 이르게한다.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기도이다. 기도로 하루를 새롭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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