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
2021년 11월 19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을 다시 봉헌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마카 4장 36-37절, 52-59절
그들은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쳤다.
그 무렵
36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52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3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4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
55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56
그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
57
또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대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방에도 모두 문을 달았다.
58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59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화답송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저희 조상 이스라엘의 하느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위대함과 권능과 영화가, 영예와 위엄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으뜸, 그 위에 드높이 계시나이다. 부귀와 영광이 당신에게서 나오나이다.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권능과 권세가 당신께 있으니, 당신 손을 통하여, 모든 이가 힘과 영예를 얻나이다.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복음
루카 19장 45-48절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9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9일 (금)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분노와 다툼의 이유
저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 말씀과 같아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 주는 사제,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싸우고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투고 얼굴 붉히며 살아갑니다.
내 실수를 인정하며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기반성보다는 상대의 아집과 욕심 때문이라 판단하고 분노하며 다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쉽게 인정해 버리고 포기하며 외면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툼과 분노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툼과 분노 그 자체보다는 무엇을 위한 싸움이고 분열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의 탐욕과 잘못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이 성전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외면당하시기까지, 그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시면서도 그들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다툼, 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유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부딪친 이유와 예수님께서 그들과 부딪쳤던 목적과 이유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다투고 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싸우고 있는 상대를 위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여러분의 ‘분노와 다툼의 이유’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치를 전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소소한 성전 정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성전의 정화라는 면에서 겹칩니다. 마카베오와 아들들은 이민족에게 뺐겨 더렵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정화하고, 복음의 주님께서도 장사꾼들이 더럽힌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앞뒤를 연결시켜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족속은 그렇게 애써 되찾아 정화한 성전을 자신이 더럽힌 겁니다.
이에 어제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오늘은 격하게 진노하시고 과격하게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자기들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고 이민족에 의해서만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럴 것 같습니다. 설마 내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이겠냐고 생각했는데 잘 성찰해 보니 실은 내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이지요.
물론 모독의 의도로 우리가 성전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의도 없이 또는 의식 없이 그러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 의식과 기도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성전에 들어와 밖에서 해도 될 담소를 성전에서 나누는 사람이 많고 차를 가지고 들어와 마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와 '하느님, 저 왔습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이는 마치 앞에 어른이 계신데 인사도 하지 않고 투명 인간 취급하며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과 같은 거지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인데 성전에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고 인간끼리 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성전 모독이요 하느님 무시지요. 우리 일상적인 의식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 아니 내 의식과 무의식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아무리 성전에 들어가도 그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는 거지요. 나라는 성전과 내 밖의 성전 모두에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성전 정화는 어떤 것입니까? 거창한 욕심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하찮은 것이라도 몰아내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때 악감정이나 큰 욕심을 몰아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유리창에 흙탕물이 묻어 있으면 잘 보이니 닦아내지만 작은 먼지들은 보이지 않으니 닦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소소한 성전 정화에 대해서 나눠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하는 집 :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L.A. 올림픽 때 다이빙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본래 다이빙 선수가 아니었고 100m 육상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시합 때마다 자주 넘어졌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풀이 죽은 딸에게 언제나 이렇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야. 엄마는 네가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 좋아. 넘어졌을 때 계속 넘어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만 보아도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나중에 다이빙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너무 기뻐.”
이 선수는 다이빙대에 설 때 항상 엄마의 이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긴장이 풀리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이 이 다이빙 선수에게 등불이자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해 준다고 그 말이 한 사람의 삶에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강도가 살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장사꾼을 채찍으로 쓸어내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말이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 듣는 사람이 나를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아와 삼구를 없애야 합니다. 그 자아와 삼구는 나의 피로서만 죽습니다.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기 위해 사용하신 채찍은 곧 그리스도의 피, 성령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으로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은 분명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분을 벙어리 취급하는 꼴이 됩니다. 마치 ‘소리 없는 사랑’이란 태국 광고와 같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듣지 못하여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이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 학생의 등에 “아버지가 바보 같은 장애인”이라는 글을 써서 붙이며 놀립니다. 자기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깁니다. 자기가 왜 힘들어하는지 들어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비뚜로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다만 딸이 착하게 커달라고 수화로 말해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딸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 합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줄 테니 딸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딸은 아빠의 피를 받고 살아납니다. 딸은 자신을 위해 피를 내어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손을 잡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이 딸의 마음에 들어가 딸을 착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삼구가 살아있으면 여전히 삼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뱀은 태초부터 하느님께 대한 불만을 심었고 아담과 하와는 삼구를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묵상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로고스에서 레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신 마비로 누워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미즈노 겐조의 시를 살펴봅시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 미즈노 겐조 -
성경의 모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굳이 따로 또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미즈노 겐조가 이미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즈노 겐조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가 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 뜬 별과 같습니다. 세.육.마.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이지만 그 별을 따라 결국에 만나게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그리스도는 레마입니다.
내가 진정한 성전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로 변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결과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감사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레마로 변해 나를 감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집입니다. 그런 집만이 성전으로 인정받고 구원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카 19,48)
헬스를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 팔뚝에 근육통이 생겼습니다. 파스를 붙여도 별 효과가 없어서 결국 병원에 갔습니다. X-Ray를 찍어 보자고 해서 찍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픈 팔뚝은 찍지 않고 전혀 다른 부위라고 할 수 있는 ‘목’을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단순 근육통이면 괜찮지만, 목 디스크로 인한 근육통일수도 있어서 목을 촬영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목 디스크면 팔에 그리고 허리 디스크면 다리에 통증이 온다고 하십니다. 전혀 다른 부위인 것 같은데,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긴 침을 맞을 때도 무조건 아픈 부위에만 놓지 않습니다. 연결된 부위를 찾아서 침을 놓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남이라며 사랑을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는 어느 가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힘을 내는 그들의 모습에 자매님께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이였지만,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당시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수석 사제, 율법학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향해 ‘강도’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좋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당장 예수님께 굴레를 씌워서 제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 아닌, 가난하고 병으로 지쳐있는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이 주님과 함께하자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을 끊지 않고 함께 할 때, 세상의 악은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하느님을 찾고 있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매일같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 성녀 마더 데레사
고통과 시련 이겨내기
지난 휴가 때에 충청북도 단양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단양에 ‘이끼 터널’이란 곳이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어떤 곳인가 싶어서 가보니, 터널 양쪽 벽이 이끼투성이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는지, 이끼 위에 남긴 낙서 등의 많은 흔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이 이끼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 ‘이끼 터널’에서는 아주 중요한 보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끼들을 보다가 그 틈으로 자란 잡초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끼들도 이 벽면을 채우느라 고생했겠지만, 이 잡초 또한 그사이를 비집고 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흙도 없는 터널의 벽면을 뚫고 나온 이 잡초가 아주 특별해 보였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는데,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정성을 보면서 정말로 대견하고 아름답게 보시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성장해야 할 것은 우리네 마음이다. 간절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진실되이 만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삶의 의미이며 기도하는 곳은 진실한 우리들 마음이다. 삶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면 삶의 모습도 바뀐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신앙의 본질인 마음을 우리가 더럽히게 된다. 희망의 마음을 잃어버린 성전은 혼탁하다. 더이상 삶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전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려 하기에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였다. 교인의 숫자를 더 늘리는 교세 확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진리를 향한 기도의 삶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패는 한순간이고 기도의 여정은 영원하다.
새로운 생명력은 간절한 우리의 기도에서 비롯된다. 기도의 짠맛을 잃어버린 성전은 매순간 힘이 없고 나날이 더욱 지쳐간다. 무엇을 위한 신앙인의 삶인지를 다시 묻게된다. 신앙인의 삶이 바로 기도하는 삶이며 더럽혀지지 않는 소금과 빛의 횃불이 기도이다.
힘찬 새출발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이 아름다울 수 없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11월 22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22 |
---|---|
21년 11월 2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21 |
21년 11월 2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20 |
21년 11월 1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8 |
21년 11월 1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7 |
21년 11월 16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6 |
21년 11월 1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