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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2021년 11월 22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성녀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습니다. 체칠리아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체칠리아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체칠리아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길 젊은이들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뽑힙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궁핍하지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헌금함에 다 넣은 과부를 보시고 칭찬하십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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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다니 1장 1-6절, 8-20절
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화답송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복음
루카 21장 1-4절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체칠리아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2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2일 (월)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깨끗하고 구겨지지 않은 돈이 없을 때에는 다림질을 해서 봉헌하셨던 어머니
주일 미사를 혼자 봉헌하기 싫어 옆 본당을 찾습니다. 제단이 아닌 신자석에 앉아 조용히 미사를 준비할 때면 또 다른 느낌이 듭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예물 봉헌을 할 때 순간 고민합니다. 평소에 헌금을 봉헌하지 않아 봉헌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색해서입니다. 그러나 봉헌을 하지 않고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 더 어색할 것 같아 봉헌을 합니다.
잠시 본당 사목의 소임을 맡았던 때 교무금으로 십일조를 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봉헌금과 교무금을 냈던 마음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부끄럽습니다. 봉헌금을 낸 이유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은 아니었나 싶기 때문입니다. 교무금도 좋은 의도라기보다는 ‘본당 신부도 교무금을 낸다. 그러니 당신들도 십일조의 원칙에 따라 교무금을 내라.’ 하는 암묵적 지시였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봉헌금이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의 마음과 자세에 집중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넣었던 렙톤 두 닢은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500원 정도(1렙톤은 당시 하루 일당인 1데나리온의 1/128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는 보잘것없지만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마음, 그리고 많이 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신권을 쓰지 않고 모아 두셨다가 봉헌금으로 내셨습니다. 깨끗하고 구겨지지 않은 돈이 없을 때에는 다림질을 해서 봉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봉헌의 마음과 자세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봉헌하는지, 어떻게 봉헌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과 의도는 어떠한지를 되돌아봅시다. 그런 우리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오늘 복음 안에서 들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끼다 똥이 되지 않도록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루카 21,3)
오늘로서 <여기 국밥>이 개업한 지 5주 그러니까 35일이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3,000 원짜리 콩나물 국밥을 하고 있는데 점차 찾으시는 지역 주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국밥집의 목적은 단지 주변 어려운 분들에게 무료 또는 저렴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를 통해 주민들과의 친교를 넓히고, 그래서 넓은 의미의 복음화를 하는 것인데 며칠 전엔 근처 목사님 부부와 신자들도 오셨기에 지역 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업이 <아나바다> 사업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환경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운동이지요.
저는 이 <아나바다>를 국밥집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통해 역시 지역 사회의 환경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고맙게도 지역 주님들 중에 차츰 이 의미를 아는 분들이 생기고, 그래서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 자기들 문건을 기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흐뭇합니다.
이 얘기를 왜 길게 했냐 하면 아끼는 것을 나누는 것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엮어 묵상하고 싶어서입니다.
물건을 아껴 쓴다는 것은 함부로 막 쓰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쓰는 겁니다. 요즘 너무 풍족하게 살다보니 사람들이 물건을 아낄 줄 모르고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물건은 곧 쓰레기가 되며, 그래서 쓰지 않고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쓰는 것은 좋지만 버리는 것은 나쁜 거지요. 아껴 쓰는 것은 더 좋고 막 버리는 것은 더 나쁘고요.
왜냐면 너무 아끼기 때문에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끼다 똥이 된다고 하잖습니까?
너무 소중하고 그래서 아끼다 쓰지 못하고 주는 것을 아까워하면 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끼지 않고 마구 버리는 것도 나쁘지만 아끼다 쓰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것도 나쁩니다.
사실 아끼는 것이 아까운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아끼는 것이 사랑이 돼야지 인색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돈이든 물건이든 아낀다는 것은 매우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인데 아끼는 것이 지나치거나 잘못 되어서 쓰거나 주기 아깝다면 인색한 거지요.
그러니까 주면 사랑이고 안 주면 인색함이며, 주면 보물이 되고 안 주면 똥이 되는 겁니다.
오늘 과부의 봉헌을 부자의 봉헌과 비교하여 가진 것을 다 드린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이 봉헌했다고 볼 수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자신을 위해서 쓰지 못하던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봉헌한 것이요 그래서 봉헌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써야 합니다. 그리고 줘야 하고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아끼다가 똥이 되지 않고 더 소중한 것 곧 사랑이 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질투하신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하느님의 이런 속성이 떠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왜냐하면, 예수님은 헌금통을 보시며 당신 아버지께 얼마나 정성을 바치는지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말이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질투 없는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질투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애완견이 있다고 합시다. 산책하다 그 애완견이 나를 따라오지 않고 다른 애완견을 따라갑니다. 그럼 질투가 납니까? 애초에 애완견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거나 혼인할 사이는 아니기에 크게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애완견이 아니라 아내나 자녀라면 어떨까요? 자녀가 옆집 아빠를 더 좋아하면 어떨까요? 아내가 집에 들어와서 계속 직장 상사만 칭찬하면 어떨까요? 질투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녀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투’를 느끼신다는 말은 인간을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드높게 여기신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투’와 ‘시기’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1)
여기서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질투하는 것일까요, 시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묶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다고 믿은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모차르트를 시기하였던 살리에리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투는 무엇일까요?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려는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줍니다. 분명히 내 사랑은 금잔에 받아야 하는데 소주잔을 들고 따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내 사랑은 나의 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그에 합당한 잔을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 때 쫓겨나는 종이 그런 사람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에 초대하면 의복까지도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팔아먹고 온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혼인 예복까지 팔아먹도록 정신이 팔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질투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찾으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온갖 장신구와 옷과 낙타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받은 레베카는 하나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이사악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사악은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머니 천막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만든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신과 한 몸이 되는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레베카가 받은 것들을 아버지에게도 주고 오빠에게도 주고 형제들에게도 주고 해서 천한 옷을 입고 왔다면 이사악은 그 모든 것들에 질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바로 레베카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이사악을 위해 다시 봉헌하기 위해 가져온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사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뒤이어 나오는 성전파괴와 연관됩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자원 예물’로 지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봉헌한 것은 쓰고 남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모실 집을 쓸 거 다 쓰고 눈치 보며 낸 것으로 지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사랑만큼 우리도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응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이 되셨지만 그들의 성전은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혔습니다. 더는 예수님께서 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나도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질투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개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응답하려면 우리도 그분이 내어주시는 것처럼 내어드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 쓰고 남는 시간이 기도드리는 것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신 분께 질투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 질투가 쌓아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질투를 일으키지 맙시다. 결국엔 자기 손해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닮아야 합니다.
조앤 롤링은 기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란 도시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동시에 해리포터의 글도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페에서 만난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 조지 아란테스와 결혼합니다. 딸까지 낳았지만 아란테스는 폭력을 행사하고 놀면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한량이었습니다. 롤링은 둘째 아이를 밴 상태여서 더는 그런 남자와 살 수 없어 다시 영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해리포터 2권까지 집필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내용이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1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0년 동안 7권의 시리즈를 내면서 현재 1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고 수백억 원씩 기부하며 출판계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란테스는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아란테스와 헤어져서 해리포터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 그때 해리포터가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란테스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꿈도 받아줄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을 살 수도 있는 재능이 있는 아내를 자신의 그릇, 혹은 자신의 집을 너무 허술하게 지어서 다 쫓아내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조앤 롤링을 보며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자리가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합니다. 그 집을 지으려면 자원 예물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우리는 남는 것만 주어서야 어떻게 그분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아닌 사랑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분 아닌 모든 것들 중 어떤 것에도 애정을 쏟는다면 그분은 질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질투하는 신을 신랑으로 맞아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면 그분께서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성전을 지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신학생 때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산에 가곤 했습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산행이 떠올려집니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는데 그날 비가 주룩주룩 계속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인데 비 때문에 오르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한 친구가 너무 힘들었는지 제게 부탁을 합니다.
“내 배낭에는 부식이 가득 들어있어서 너무 무거워. 배낭을 바꿔서 매면 안 될까?”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흔쾌히 바꿔서 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배낭은 가벼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의 산행으로 힘이 빠진 친구들이 제 배낭 안의 부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배낭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은 원래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을 위한 행동인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합니다. 이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봉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적은 액수는 티도 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하루치의 식량 값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티도 나지 않는 적은 액수이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너무나도 큰 전부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봉헌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비 전부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너무 적지 않나? 아니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 봉헌에 하느님께서 굳이 바라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이 결국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정성 가득한 봉헌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 마음을 가로막을 문도, 자물쇠도, 빗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버지니아 울프
진짜 힘 있는 사람
군대 생활을 할 때의 선임병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선임병은 그 당시 부대에서 ‘최고 병사’였습니다. 총도 잘 쏘고, 훈련 중의 작전 수행 능력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더군다나 운동도 너무 잘하고, 도대체 못 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임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재 취업이 되지 않아 하는 일 없이 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그래도 군대에서는 날아다녔었는데, 지금 왜 그럴까요?”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상에서의 힘이 진짜 힘입니다. 전쟁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상 삶 안에서 전쟁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즉, 일상에서 필요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해봤자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은 그냥 그리움으로 기억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목표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상에서 힘을 내는 진짜 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마지막 한 잎 마저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온마음이다. 자아에서 벗어나야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생활의 최종목적지는 하느님이시다. 생활비를 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모두 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떠나서는 봉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봉헌이다. 모든 생활이 정성어린 봉헌의 연속이다. 봉헌은 주님을 드러내는 삶의 중요한 핵심이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봉헌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봉헌이다. 생활의 방향은 봉헌의 방향과 일치한다. 하느님을 향하는 봉헌이 필요할 뿐이다.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은 생활의 집착이 아닌 생활의 봉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삶의 근본이 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이다. 생활이 되시고 생활을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성녀 체칠리아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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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11월 2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21 |
21년 11월 2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20 |
21년 11월 19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9 |
21년 11월 1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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