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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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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2021년 10월 22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는 풀이할 줄 모르냐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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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7장 18-25ㄱ절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18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의 계명을 제가 믿사오니, 올바른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소서.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은 좋으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자애를 베푸시어 저를 위로하소서.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당신 가르침은 저의 즐거움이옵니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 규정으로 저를 살리셨기에, 영원토록 그 규정 잊지 않으오리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이 몸 당신의 것,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찾나이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54-59절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2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토라)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목숨과도 같았으며, 율법의 준수 여부가 행복이나 축복 또는 저주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곳곳에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드러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율법에 대한 신심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시편 119(118)편은 전체 150편 시편 가운데 가장 긴 시편으로, 모두 176절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길지요. 

이를 이른바 ‘알파벳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에는 스물두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시편 119 (118)편은 하나의 알파벳을 여덟 절마다 사용하여 총 176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구성된 것은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동시에 시편 119(118)편은 율법을 ‘법령’, ‘계명’, ‘가르침’이라고 다르게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성실하고,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마음부터 생깁니까? 긍정적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 거부감인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내리신 예수님의 ‘불행 선언’ 때문에, 어쩌면 율법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저의 즐거움”이라고 찬미하였듯이, 주님의 법령과 계명, 가르침과 규정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시편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시편 119(118)편을 다시 한번 읽고 되새겨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 개의 나, 내 안의 나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요즘 말로 요약하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또는 두 개의 내가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자아의 분열은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저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고, 우리의 의지에는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내 안에는 지금까지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내가 있는데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내가 마음먹었다고 바로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없기에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분열이 있게 됩니다. 

사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는 우리 속담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것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1987년 제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교또에는 코리안 센터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일간의 왕래가 많지 않았기에 그때 미사는 오래간만에 한국에서 온 신부가 교포들에게 우리말로 드리는 미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강론을 하는데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 강론이 감동적이서가 아니라 한국말 강론이었기 때문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미사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데 일본말은 잘하시지만 우리말은 잘못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안 해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알아듣는 것은 좀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와닿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그런 분들이 치매에 걸리면 어떤 분은 일본말을 싹 잊어버리고 잘 못하는 우리말만 해서 아파 병원에 가면 통역이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배운 말과 엄마가 해준 음식이 우리 안에 깊이 박혀 있고, 그렇게 형성된 습관과 기호와 인식과 의식이 나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런 나는 쉽게 바뀌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지요. 

게다가 제가 그저께 우리 안에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있고 감성이 상선을 쫓지 않으면 욕망이 하선을 따르게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아무리 이성이 진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고 의지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욕망을 따라 산 사람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이성의 법을 따르기 쉽지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니 그저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프란치스코처럼 체험하기 전에는 그리고 시편 말씀처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고 하느님 체험을 했다 해도 그 좋으심에 깊이 맛들이기 전에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두 개의 내가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면서도 결론처럼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인성 면이나 성덕 면에서 바오로 사도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이 싸움을 포기하겠습니까, 구원자 주님의 도움으로 계속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인간은 저절로 사탄이 되어가는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그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어야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오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이 시기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입니다. 곧 당신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때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시기란 이제 우리를 고소한 자에게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라고 하시는데, 합의한다기보다기보다는 수동태로 “풀리도록(to be released) 힘써라!”로 번역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풀려나는 것이지 내 힘으로 능동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이 그리스도 피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용서로 풀리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다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합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다.”

내 죄책감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넣어주셨고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심판관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우리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됩니다. 양심은 나를 고소하는 알람과 같은 기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나를 고소하기 위해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재판관’에게 넘겨지는데 여기에서 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스스로 죄인으로 심판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옥리’에게 넘겨지는데 옥리는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죄책감은 나를 사탄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양심의 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엔 죄와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이 없다거나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믿다가 은퇴한 한 아버지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뜯어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친구를 납치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는 아버지가 친구를 죽인 것을 알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경찰에 걸리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저런 가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도 원죄의 영향으로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알렉스가 자살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자기 힘으로 무마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양심이 없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합리화가 지나치면 결국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양심의 문제를 내버려 두면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기합리화를 멈추면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사이코패스가 되었고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굴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자살한다고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쨌건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고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서만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변하지 않는 굴레를 이해하고 빨리 성령을 받고 탈출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장착해주신 하느님만 다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방법은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이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받으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자아와 사탄에게 넘겨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사탄이 되어가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발자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끌려가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

 

UC 버클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1만 원을 나눠주고 익명의 낯선 이와 원하는 만큼 나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수입의 3%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반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만을 기부했습니다(물론 이 1%가 전체 기부금의 70%를 상회합니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이 비록 돈은 적지만 사랑을 많이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부자가 더 많은 액수를 나누기는 하지만 여유 있는 데서 조금 나누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판단력을 잃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 삶의 방식을 잘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이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묘한 핑계를 붙여서 꼭 내 마음대로 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득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우리였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모습이지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와 핑계를 댔었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표징을 볼 수 있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끝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시간을 겪어낼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 정옥희

 

 

감사할 일이 왜 없는가?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를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게 된 하나의 계기는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여행 중에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는데 자신의 낡은 신발이 없어진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께 “하느님도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게 하십니까?”라며 외쳤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라 여관집 주인이 헌 신발을 건네며 미사에 같이 참석하자고 권했습니다. 마지못해 끌려갔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생각으로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바덴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겠구나. 그런데 나는 겨우 신발이 없어졌다고 하느님께 원망까지 하고 있으니….’ 
 
이 체험이 그를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7)

 

스스로와 저절로 사이에서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신앙의 기초는 올바른 일을 스스로 하는 데 있다. 올바른 일을 위해 그릇된 것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고 고칠 것은 고치는 실천이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음을 고치는 데 있다. 마음을 고치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쓰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법이다. 우리시대는 참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뿐이다. 

삶이 더러운 것은 마음이 더러운 것이다. 복음은 마음의 회복이다. 삶이 어지러울수록 마음과 마음의 화해가 중요하다. 마음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거기어 우리마음이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지를 다시 자신에게 묻는다. 

올바를 일이란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며 자기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변화하고 싶은 마음과 변화하려는 실천이다. 마음도 먹어야 산다. 

마음은 결심을 먹고 산다. 순간순간 돌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우리들 마음이다. 단풍은 우리 마음을 물들이듯 마지막 한 닢까지 허공과 어우러진다. 처음도 마지막도 마음이다. 힘 써야 할 올바른 마음이다. 

올바른 일의 시작에는 올바른 마음이 있다. 올바른 마음은 매일매일 복음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갈 것이다. 복음의 힘은 마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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