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0.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0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

 

 

2021년 10월 20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죄의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게 하고, 그럼으로써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0일 (수)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6장 12-18절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형제 여러분, 

12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저들 이빨에 우리를 먹이로 내주지 않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39-48절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9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이라는 말 그대로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었습니다(시편 122[121],1 참조).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또한 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는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품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 바로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의로움의 도구”답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행복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전을 향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고 또 성전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성전은 ‘기쁨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의 악용

 

어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해졌다는 말씀에 이어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은총의 악용이 있지요. 악용이란 선을 악하게 이용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은총을 악용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늘 용서하고 내 편인 엄마가 있으니 그 엄마의 약점을 이용하여 죄악을 저지르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도 엄마도 사랑이 약점입니다. 하느님도 엄마도 사랑하기에 모든 고통과 시련에 강하기도 하지만 자녀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고 은총을 악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선 은총을 악용하면 은총은 은총이 아니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은총을 악용하면 은총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은총 때문에 인성이 타락하여 죄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은총 지위를 상실함은 물론 죄의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방금 인성이 타락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점점 욕망을 쫒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우리의 욕망이 상선이 아닌 하선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이 진리를 따르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싫어도 하느님 뜻을 따르게 해야 하는데 우리의 감성이 당장 좋은 것만 쫓기에 욕망이 설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것을 욕망에 순종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쫓지 않으면 하선을 쫓게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성향의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기 전의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좋은 것을 감각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최대한 즐기며 살았는데 그런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주인과 종 중에 누구를 섬길 것인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이고, 즐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상선인 은총을 즐기고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인과 종 중에 어떤 것을 섬길지 프란치스코처럼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잘하는 걸 원하실까, 끝까지 하는 걸 원하실까?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종, 특별히 사제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제들이 깨어있는 방식은 이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사제에게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그러니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양식은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성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강론준비나 교리나 성경과 같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질은 떨어지더라도 제때에 말씀을 전하는 게 더 좋을까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질적인 것보다 ‘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질 좋은 강론은 준비하다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때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저절로 질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꾸준히 양식을 내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서 우울감이 오고 그래서 또 우울하게 만들어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영화 ‘비버’(2011)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월터 블랙과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냥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 직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월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망해가고, 가족 관계도 파탄이 납니다. 자살도 실패할 정도입니다.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고 아이디어가 보이기 시작해 회사도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영화에서는 월터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바로 자기 손에 끼어 있던 비버 인형과 대화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며 자신을 비버로 여깁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비버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줍니다. 사람들은 월터와 이야기하지 않고 월터의 비버와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비버처럼 여기는 것은 분명 자기비하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대치보다 못 미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버로 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비버가 하는 모든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결과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비버는 기껏해야 나무때기로 작은 댐을 만들면 그것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비버라고 여기면 자기비하입니다. 결국, 월터는 비버 때문에 자기 팔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는 우리 자신이 정말 비버보다 더 나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러면 그냥 작은 일을 해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겁니다.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이빙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미국이 금메달을 따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합니다. 7주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때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얼마큼 큰 부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3년간의 준비 과정을 수포로 돌릴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존감이 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맨밥을 주시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반찬이 없어 맨밥에 물 말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둥둥 떠 있는 쌀벌레들을 제거하고 맨밥을 먹자니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물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소위 총각김치를 찾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그렇게 주는 것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굶기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양식을 거르지 않고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굶기지 않으신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완벽히 준비된 양식을 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때에 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존심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때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함을 도모하다가 시작도 못 합니다.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건 그렇게 하는 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양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실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님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실망스럽고 우울하고 멈추고 싶다면 생각하십시오. 그건 교만함 때문이란 것을. 예수님은 제때에 양식을 주라고 하셨지 그 질적인 면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고 제때에 양식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죽이든 밥이든 깨어있음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걸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는 주님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들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할 준비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십시오.

 

50대 후반의 이 형제님은 당뇨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 사실은 형제님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 재활치료를 받는 데 비참함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떤 환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그래도 열심히 재활치료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면서 함께 치료를 잘 받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두 다리가 그대로 있잖아요.” 
 
그러자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고로 제 아내를 잃었습니다.” 
 
누구의 상실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상실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상실 속에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태에서도 힘차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나의 모습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삶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힘을 내는 삶을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하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우리가 할 준비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그 모든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해야 할 준비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세상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이라는 구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술, 마약 등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받은 만큼 많은 것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시는’(루카 12,48)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 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글을 쓴다는 것

 

어느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하루 15분씩 나흘 동안 본인 인생의 가장 상처가 되는 경험에 대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강점’을 글로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학생들은 상처가 되는 경험이 귀중했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98%의 학생들이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학생들은 글로 쓰는 것을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경험을 통해 건강이 오히려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상처가 된 경험을 글로 썼던 학생들은 이 연구 이후에 교내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든 것입니다. 
 
글을 쓰면 객관적 시각을 얻게 됩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책을 찾는데 쓸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40)

 

겨울을 준비하는 깨끗한 가을의 비워내는 여정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필요한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실행이다. 실행의 정점이 준비의 완성이다. 이렇듯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기신 하느님의 것들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삶은 말씀과 양심을 통해 정신을 차리게 된다. 정신은 깨어있는 준비의 여정이다. 준비의 첫걸음이란 우리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 정신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다시 성찰하게 된다. 준비 없이 삶은 충실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충실한 삶이란 그릇된 모든 것들을 비워내는 일이다. 비워내야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담을 수 있다. 비워내야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될 수 있다. 올바른 정신이 올바른 삶으로 이어진다. 

부끄러운 준비가 아닌 올바른 준비가 우리가 맞이해야 할 만남의 으뜸이다.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나날의 맑은 준비가 깨끗한 구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힘임을 믿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