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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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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2021년 10월 19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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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5장 12절,15ㄴ절, 17-19절, 20ㄴ-21절

 

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당신을 찾는 이는 모두,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열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35-38절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9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주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이렇듯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주인이 그 당연한 일을 한 종들을 위하여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듭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뀐 듯합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러한 변화를 자처할까요?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들까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종이 되어 주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깨어서 성실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만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면, 종은 주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지 않고, 등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불행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행복한 종이 되고자 깨어 노력하는 사람과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주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으로 죄에서 사랑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죄와 은총의 관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 주제를 얘기할 때 제가 자주 얘기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회개는 무엇이며 올바른 관상은 무엇일까와 관련된 것인데 이 회개와 관상이 사람에 따라 차이랄까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죄에 대한 감수성이 너무도 무딘 사람이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전혀 또는 너무도 모르고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 성찰이 없는 이에게 회개는 기미도 없을 것이고 관상과 같이 너무 고상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양심에 가책이란 것이 없으니 속 편하게 살며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다음은 자신을 성찰할 줄 알고 죄에 대한 감수성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가능성이랄까 싹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찰이 자기 성찰에만 그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그런 성찰은 회개의 성찰이 되지 못하고 그런 관상은 자기만 보고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이 경우 회개는 회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회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그래서 어찌보면 앞의 무딘 사람보다 더 괴롭고 불행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회개와 올바른 관상은 자기 죄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도 보고 하느님도 보며 자기 죄도 보고 하느님 은총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렇게 볼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에로 나아간다고 했는데 그렇지요. 죄책감과 회한에 머물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로 나아가 그 사랑에 마침내 머물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오랜 영성 전통에 삼중도(三重道, Triple Ways)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화와 조명을 거쳐 마침내 일치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정화란 말할 것도 없이 죄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고,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조명의 은총입니다. 

은총을 받는 사람은 햇볕 좋은 날 빨래를 빨아 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죄책감으로 자기 안에 또는 어둔 골방에 갇혀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볕을 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은총으로 자기 죄를 씻고 하느님 사랑에 머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임을 볼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죽기 얼마 전 형제들에게 편지를 쓴 다음 형제들을 위한 기도로 편지를 마감하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하느님 은총으로 자기 죄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비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의 길 : 열정의 띠를 매고 사랑의 등불을 들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이란 '언제나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종’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원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야 하고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띠’가 무엇을 의미하고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깨어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띠’는 ‘봉사할 자세’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받은 대로 해 주신다면 분명 우리가 한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이란 ‘사랑과 봉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등불’을 들고 허리에 ‘띠’,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십자가를 메시고 우리에게 봉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매 순간 사랑실천을 위해 성령으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행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등불을 들고 ‘실천’이라는 띠를 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화 ‘네이든’(2017)은 영국 수학 천재 소년 네이든의 유년기 실화를 담았습니다.

네이든은 자폐아입니다. 감정을 표출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회성이 뒤처집니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네이든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주고 아버지는 특별히 네이든이 수학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이든과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네이든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주려 하지만 네이든은 마음의 문을 닫아겁니다. 어머니는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 오라고 할 때 항상 소수(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나눌 수 없는 수: 2, 3, 5, 7, 11, 13, 17, 19)로 사오기를 원합니다. 엄마는 새우튀김을 사갈 때도 9개 준다는 것을 7개만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항상 네이든에게 무식하단 취급을 받습니다.

어쩌면 네이든은 아버지가 죽은 원망을 어머니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든은 수학에만 더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환자에게 능력까지 없다는 것은 그냥 모자란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든은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 영국 대표 16명 예비 명단에 올라갑니다. 이 중에서 6명의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위해 대만에서 진행되는 2주간의 합숙 훈련에 참여하게 되어 네이든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됩니다.

16명의 영국 아이들은 대만 아이들과 짝을 이루는데 네이든은 장메이라고 하는 여자애와 짝이 됩니다. 그러나 악수도 못 하고 어찌 대해야 할 줄 모릅니다.

장메이는 그냥 사랑 가득한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활달하고 아무 표현도 못 하는 네이든과 잘 놀아줍니다. 새우튀김이 8개라고 주저할 때 그냥 하나를 집어먹어 7개를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가장 어려운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장메이에게 네이든은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낍니다. 다행히 둘은 각 나라 6등으로 나란히 올림피아드에 나갑니다.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장메이는 긴장을  했는지 네이든의 방에 찾아옵니다. 네이든은 좀 쉬다 가라고 합니다. 둘은 가벼운 뽀뽀를 하고 그냥 잠이 듭니다. 그러나 대만 지도자가 아침에 갑자기 들어왔고 장메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네이든은 시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랑의 공식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응원하러 왔던 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네이든은 엄마에게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느냐며 웁니다. 그런 네이든을 엄마는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장메이를 만나러 역에 가자고 데려다줍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띠를 매고 등불을 들어주기만을 기다린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먼저 띠를 매고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네이든은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앞 좌석에 탑니다. 그렇게 네이든과 장메이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다니엘 라이트윙’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네이든에 의해 7등으로 아쉽게 떨어진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도 자폐증 진단받았지? 난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까 이상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근데 특별하지 않다면 그냥 이상한 거야!”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빛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함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곧 수학이나 돈, 재능, 명예 등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비록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어도 그것이 등불이 아니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종교를 통해서도 특별해지려 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사랑으로 특별해지려 해야 합니다. 그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네이든의 아빠처럼 자녀들에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띠를 매어주고 네이든의 엄마처럼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사랑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불을 손에 들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줍시다. 이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항상 구쁘다.

 

어느 개그맨이 ‘나는 항상 구쁘다’라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구쁘다’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자인지, 아니면 속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줄임말도 속어도 아닌 순우리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말을 50년 넘게 사용해왔음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배 속이 허전하여 자꾸 먹고 싶다’,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라고 합니다. 
 
한국인이 한국말도 잘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 많은 분이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주님에 대해 우리는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주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만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를 알고 있는 듯 사는 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늘 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완전히 모르기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아는 사람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살게 됩니다. 미움과 판단보다는 사랑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종은 바로 주인의 뜻을 듣고 기억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이 제대로 기다릴 수가 있을까요?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과연 주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지 않는다면서 미움의 감정을 품는 사람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다리며 주인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특히 사랑으로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라. 행복을 준 만큼 행복해진다.

- 아브라함 링컨

 

 

걱정의 점수

 

걱정의 점수를 1에서 10점까지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집의 가보라 할 수 있는 도자기를 도둑맞았다.’ 
 
보물인 ‘가보’이기에 걱정의 점수가 꽤 높을 것입니다. 지금 최고의 고민거리라면 어쩌면 10점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이에 대한 걱정의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큰 슬픔과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걱정의 점수는 최고 점수인 10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보물을 잃어버린 일의 걱정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10점이 될 수 없습니다. 7점 이하, 어쩌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지금 어렵고 힘들다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냐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중입니다. 이 점수를 낮추는 것은 남이 해주지 못합니다. 바로 나만이 최고의 걱정을 가져다주는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바라보면 점수를 매기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7)

 

행복을 아는가? 깨어있음이 행복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깨어있음에 있다. 삶이란 깨어있음으로 삶을 채우는 여정이다. 깨어있음을 주님께 내어드린다. 깨어있음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신앙의 길이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 깨어있는 몸에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 찌그러진 마음을 펴게하는 깨어있음의 정신이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는 깨어있음의 우리 마음이다. 내려놓는 결단과 진실한 소명이 깨어있음의 길이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은 깨어있음의 기쁜소식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지켜내는 깨어있음이 우리 곁에 있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행복하고 행복은 깨어있음으로 기적같은 사랑이 된다.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깨어있음은 회개이며 반성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깨어있는 오늘 그날이다. 첫마음을 잃지 않는 깨어있음으로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절망을 치유하는 깨어있음 그 희망과 구원또한 깨어있음에 있음을 믿는다. 구절초를 적시는 가을비가 마음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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