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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2021년 10월 18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의 선포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곧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들 떠나고 루카만 함께 있다며 마르코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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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2티모 4장 10-17ㄴ절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11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14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화답송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복음
루카 10장 1-9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거룩한 제대에서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복된 루카가 전한 복음을 충실히 믿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8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8일 (월)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루카복음서의 특징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복음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전후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탄생,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유년 시절 이야기, 특히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루카의 시선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 곁에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은 이름 없는 목자들이었습니다(루카 2,15-20 참조).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이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보는 루카의 마음은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루카 1,51-53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 일흔두 명의 파견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루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를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그가 전해 준 예수님을 다시 떠올리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양이 이리와 평화로이 공존하듯
루카 복음사가 축일에 루카 복음을 듣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지요. 그리고 루카 복음이 다른 복음과 어떻게 다른지 보면 루카 복음사가가 주님의 어떤 점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일흔두 제자 파견을 얘기하면서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고 하는데 열두 제자 외에 다른 제자를 또 파견하셨다는 얘기이고, 이 사실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특이한 점 또 하나는 열두 제자 파견 때는 없는, "가거라"라는 명령어를 명백히 쓰신다는 점인데 다른 복음사가는 물론 루카 복음사가도 열두 사도 파견 때는 쓰지 않습니다.
이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이 의미가 작지 않고 너무도 중요하지요.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이고 그래서 프란치스칸 생활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도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말을 들었잖아요.
그렇다면 "가거라"는 명령어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가거라'는 단순 강조 정도 이상입니다. 새로운 삶을 택하라는 엄중한 요구이며 경계를 뚫고 가고 넘어 가라는 명령일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일어서야 할 때 주저앉아 있고, 가야할 때 안주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집과 고향에 안주하기도 하고, 자기 나라와 민족에 안주하기도 하고, 편한 사람과 친한 사람만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하고, 복음에 우호적이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으려는 사람에게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할 땐 하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며 가는 길에 아는 사람과 인사도 하지 말고 노닥거리지도 말라고 하시고, 가서는 평화를 전하되 원치 않으면 발에 먼지를 털고 떠나라 하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복음과 평화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이요, 무엇에 의탁하지 말고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뜻이지요.
며칠 전 민족의 화해와 일치 위원회 회의를 하는데 실망을 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북쪽 사람들이 워낙 완강하게 복음을 거부하니까 선교는 잠시 미루고 인도적인 지원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이슬람의 술탄을 찾아갈 때 정말 아무것도 가져 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여 복음과 평화의 정신만 가지고 간 것과 같습니다.
사실 루카 복음사가가 주님의 입을 빌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바오로 사도를 따라 이방인 선교를 하며 실제로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특히 이슬람 선교를 얘기하며 싸우지 말라고 하는데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복음 때문에 다투고 죽였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양을 이리 때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양으로서 이리와도 평화롭게 공존하라는 가르침을 오늘 받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온전히 형성되었을 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의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루카 10,4)
중세 때, 어느 기사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의 부모님께서는 위험한 전쟁터이기에 쇠로 만든 아주 튼튼한 갑옷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떤 화살도 또 칼날도 뚫을 수 없는 아주 튼튼한 갑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갑옷을 입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대신 종이로 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이것도 갑옷이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 사람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무겁고 힘들어도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갑옷의 무게를 이겨낼 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갑옷 탓을 하면서 종이로 만든 갑옷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편함이 큰 후회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치 이 무거운 쇠로 만든 갑옷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갑옷을 입어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주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어리석게 보여서 종이로 만든 세상의 갑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면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주의사항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세상의 종이 갑옷이 아닌, 주님의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 다른 사람은 모두 세상 안에서 나에게 도움을 줄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주님께만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불편이 가득할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서는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의 유혹이 침범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많은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은 실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따른다면 세상의 것이 하나도 없어도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사에는 안정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성공에 들뜨거나 역경에 지나치게 의기소침하지 마라.
- 소크라테스
자신의 노력을 먼저 생각합시다.
‘~면 좋겠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더 많이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 이번에 승진했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얼마나 많이 또 자주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의 뜻은 이와 똑같지 않나요?
“내 행동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인내는 전혀 생각하지도 또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자신에게 주어지길 바라는 공짜 심리입니다.
자신의 의도에 맞춰 살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노력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때, 실제로 더 나은 ‘나’, 내가 원하는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루카 복음을 다시 읽는 이유
이미 넘치는 은총의 삶이다. 인생의 다양한 길을 루카 복음을 통하여 만나게된다. 삶이 내뿜는 다양한 색채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말씀으로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자연스레 보게된다.
삶이 있는 곳에 복음이 있다. 삶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을 만난다. 루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람이 사는 행복을 되찾아주는 이야기들이다. 인생의 전부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일상에서 평범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루카는 모두가 다르지 않는 참된 평등을 강조한다. 진정한 회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기쁨의 회개는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자신이 해야할 참된 기쁨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루카는 잘 보여주고 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쉬운 것이 어려운 것이다. 제대로 보는 일이다. 양 극단에서 중도를 만난다. 마르타와 마리아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바리사이와 세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가 된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루카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기쁘게 나누고 있다. 루카 복음을 다시 읽는 이유이다.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은 하느님 사랑을 우리 일상에서 다시 만나게 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수확의 기쁨이다. 일상의 기쁨이 복음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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