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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6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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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2021년 10월 16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6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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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4장 13절, 16-18절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다.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당신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한 말씀 기억하셨네.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8-12절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0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이라는 말 그대로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었습니다(시편 122[121],1 참조).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또한 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는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품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 바로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의로움의 도구”답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행복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전을 향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고 또 성전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성전은 ‘기쁨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모른다고 할지라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기에 이것이 꼭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제자들, 특히 베드로 사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제게는 들립니다. 

잡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 모두 달아났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기에 이것이 꼭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제자들, 특히 베드로 사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제게는 들립니다. 

왜냐면,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잡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 모두 달아났고, 주님 뒤를 따라갔던 베드로 사도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오늘은 이렇게 '누구든지 모른다고 하면'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뒤에는 제자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 사도의 배신을 꼭 집어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그러니 모른다고 하는 것은 치매 환자나 건망증 환자처럼 인지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처럼 증거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지요. 

그러니까 정말 모르기에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알면서도 모른다고 한 것이기에 이것은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의 관계를 거부하는 곧 관계를 끊고 살겠다는 단절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절을 선언하기 전에 선택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 아니라 모르는 채 살기로 선택하고,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선택과 단절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도 단절하실까요?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한 우리를 천사들 앞에서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런데 모른다고 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나타나셔서는 기어코 증언자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단절을 선택해도 주님은 단절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부모만 관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어떤 후레 자식이 출세와 결혼을 위해 무식한 부모와의 관계를 끊을지라도 부모는 자식과의 관계를 끊지 않잖아요?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모른다고 하실 거라는  말씀은 삐져서 하신 말씀이나 엄포를 놓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관계 단절의 이치를 설명하시며 우리에게 엄중히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관계는 쌍방 단절도 있지만 한 쪽에서 관계를 끊어도 끊어지는 것임을. 

남북 군 통신선을 북한이 끊어버리자 우리가 아무리 이으려고 해도 안 되듯 주님과의 관계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계를 단절하면 누구 손해이고, 누가 아쉽습니까? 우리 손해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아쉬워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손해가 없는 주님이 더 아쉬어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끊으면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못 받는 우리가 손해지만 단절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우리의 손해를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이시지요. 

어제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셨는데 주님의 벗인 우리가 이런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세상을 선택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적 광견병에 성령까지 모독하는 죄를 짓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악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실 때 그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선물을 줄 때 선물 안에 담긴 사랑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혹은 이런 것도 예가 될 것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가 하늘이 열려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보는 환시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귀를 막고 스테파노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런 두 예를 볼 때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것 같기는 합니다.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중에도 치사율이 100%인 유일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수병’입니다. 개에게 물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물을 두려워하게 되어 결국 탈수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물이 무슨 죄가 있을까요? 그러나 자기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물론 물 안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꿀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 자체를 두려워하여 마시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이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이 유다인들에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인 피해를 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증오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피해의식’입니다. 또는 스테파노 성인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죽는 것처럼 귀를 막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벼랑 끝, 상담』이란 책에 나온 피해의식 환자의 한 사례를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은 지독히 미워하고 딸만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는 폭행을 당하고 그런 딸을 어머니가 과잉보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남성에 대한 불신과 그와 반대로 여성에 대한 극도의 믿음이 커집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 피해의식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대상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고 심지어는 아들에게까지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학대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는데, 결국 찾아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외도를?’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학대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DNA 검사를 받고 나서야 아들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아들도 내가 가진 피해의식이 사랑의 선물로 보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 물건을 살 때도 식은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사촌 동생과 고모로부터 반지를 훔쳐 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제 돈 주고 사도 나올 때 혹시 훔친 것 아니냐는 모함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피해의식은 누가 무엇을 주어도 좋은 의도로 줄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돈 주고 사도 불안한데 거저 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엔 이렇게 ‘사랑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데 결국 그렇게 성령까지도 무시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여기는 ‘피해의식’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아도 부모가 주는 음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은 욕해도 성령은 모독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에서 옵니다. 어렸을 때 당연히 받아야 하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 피해의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격리하여 키운 원숭이는 세상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무서운 존재로 여기며 무리에 섞이지 못하게 됩니다. 혼자 자해하고 자위합니다.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하여 새끼가 자신에게 오더라도 그는 새끼까지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겨 새끼를 밀쳐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까지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그 꼴로 자라고 내버려 둔 하느님을 거부하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사랑까지도, 심지어 성령까지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입은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랑을 다시 받음으로써 믿음으로 바뀝니다. 주위에서 부모보다 큰 사랑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저 자신이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족한 사랑을 채우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가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남이 안 해 주면 나라도 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보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렸을 때 심어지고 자라나는 피해의식을 없애고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걱정하지 마라.

 

자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외모도 시원찮은 자신의 단점만을 바라보며 그는 불평불만만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에 걱정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걱정에 힘든 시간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피정 갔다가 지도 신부님께서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모습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피정에 참여하는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자신이 적은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장점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이들의 장점도 보였습니다. 즉,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불평불만 하면서 걱정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조그마한 상처와 아픔에도 쉽게 절망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이 되시는 말씀을 하시지요. 
 
“걱정하지 마라.” 
 
심지어는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면서 ‘말하는 것’조차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주님이십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걱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주님께서 계시기에 걱정 없이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걱정을 가져가십니다. 우리의 몫은 걱정보다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행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햇빛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웃는 얼굴도 햇빛과 같이 친근감을 준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려면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

- 슈와프

 

 

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아침에 전철역에 나와서 저녁까지 전철만 타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1호선도 탔다가 2호선, 3호선, 4호선…. 가릴 것 없이 느낌대로 전철을 타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일하지 않는 무직의 실업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화가로 사람들의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전철을 타며 사람들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조는 사람, 스마트폰에만 집중하는 사람,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창밖을 보며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등…. 
 
모든 것이 그의 만화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서 돌아다니는 하루 여행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 집중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전철만 타고 있다면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지만, 만화소재를 찾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일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가? 
 
바로 내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 12,12)

 

성령께서는 새로운 삶을 향해 활짝 열려 있으시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에는 언제나 가장 좋으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간격을 없애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희노애락에 함께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자비를 나누시는 가장 좋으신 인격체이시다. 인격체는 인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사랑으로 드러난다. 참된 관계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참된 소통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일깨우시고 인도하신다.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신다.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하시는 분이시다. 단절된 삶을 하느님께로 이어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이다. 생명의 나아갈 방향을 알고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 우리의 삶을 내맡긴다. 새로운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게하신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소통으로 밝히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려주신다. 성령의 뜨거운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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